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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Nov 18. 2023

공산주의에 관하여(1)



숨을 몰아쉬고 손가락을 풀어보자. 길고 긴 이야기가 될 테니 달콤하고 따듯한 코코아 한잔도 빠질 수 없다.


가볍고 잔잔한 노래를 틀어 분위기를 가라앉히자. 소곤소곤 재잘거리는 기타 연주가 마치 처마 위로 떨어지는 가느다란 빗소리처럼 마음속에 작은 파문이 일도록 마음을 놓아 보자.


펜을 잡은 손을 멈추고 허공으로 잠시 눈길을 던지자.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는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자. 내 가슴에 담긴 이야기보따리를 찬찬히 살펴보자.


나는 선배들의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 무겁고 진중한 얘기이지만 우리네 삶에 작은 영향을 끼치는 얘기를 할 때에는 언제나 다소곳한 말투로 부드럽게 전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선배들은 그토록 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질 못했다. 그들은 투쟁에 나섰지만 여유가 없었다. 아마도 시대가 그들을 일으켜 세운 뒤 관성을 따라 저절로 큰소리로 외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글은 불신자들의 땅에 살고 있는 소심하고 왜소한 순교자의 고백으로 읽히길 바란다. 땅바닥에 주저 않아 낮은 음조로 말하는 무덤덤한 목소리가 무심코 지나가던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는 것처럼.


그리고 때로는 코트를 두 손으로 꽉 여민 채 폭풍 속으로 걸어가던 한 남자가 갑작스럽게 내리쬐는 햇빛의 온기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것처럼.


나는 언젠가 토론에서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주장하는 논객으로 여겨지는 발언을 남겼다. 마치 사랑을 고백하는 한 남자처럼 자신 안에 들어 있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공산주의라는 큰 풍선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하늘 높이 올라가던 그 파란 풍선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당겼고, 그럴수록 풍선의 겉면은 쪼그라들었다. 이토록 무거운 주제를 이토록 평온한 가을 한낮에 다시 꺼내드는 용기는 과연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점심시간이 조금 지난 시간 서울 이태원의 어느 곳에 위치한 코코아로 유명한 집 앞에 잠시 발길을 멈춰 서서 안쪽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반짝이는 햇살로 가득한 길거리와 달리 그곳은 여느 선술집처럼 살짝 어두운 조명 아래 짙은 갈색의 원목테이블이 동그랗게 놓여 있고, 그 주위로 삼삼오오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꿈에 나올 만한 한 여인이 현대의 신여성과 팔짱을 낀 채 코코아 집 안으로 들어섰다. 기대하지 않던 순간에 여신을 영접한 놀라움이 그곳을 들어갈 용기마저 훔쳐가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 차에 올라타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랜만에 노래를 저장해 둔 장치에서 폴더 하나를 감각적으로 골라 틀어놓았다.


고요한 호숫가처럼 잔잔하고 부드러운 선율이 부끄럽다는 듯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듯 하더니 갑자기 손을 뻗어 내 귓불을 잡아당겼다. 감미로운 축복을 받은 사람처럼 한동안 그 음악에 빠져 헤어져 나오지 못했다.


나긋나긋한 여자의 목소리는 내 어깨 위에 그녀의 가녀린 손을 얹고선 귓속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난 뒤에야 느끼는 것이지만 삶과 정신적 영역의 경계선 사이에서 간혹 마주칠 수 있는 환희로 가득 찬 체험에도 넘쳐나는 행복감을 빠질 수 있는데 사람들이 마약에 중독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노래들도 하나같이 내 삶의 갈림길에서 쓰러진 나를 위로를 해주고 일으켜 세워준 곡들이었다. 연달아 이어지는 노래들 사이에서 나는 은밀한 달빛 같은 회상에 빠져 다시금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이때 충분한 위로를 받아 기운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펜을 들 용기가 마음속에서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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