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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Nov 03. 2023

관악산에서 마주친 부부들(4)




아직 중년에 불과하지만 내가 만일 우연히라도 노년의 삶에 재미가 있다면 그 에너지의 근원은 아마도 의연과 초연이 아닐까 싶다. 더 이상의 미련이 없다는 마음과 더 이상 가릴 게 없다는 분별하지 않아도 되는 삶의 양식이 노년의 매력이지 않을까.

조금 전 지나친 장년층의 두 부부를 보면서 그들의 삶이 비록 순간순간 옥신각신과 용쟁호투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서로에게 의연했다. 어찌 보면 자기 자신의 투박하고 거친 모습에조차도 초연했다고도 할 수 있는 그들을 보면서 한껏 부러워졌다.

의연과 초연, 이는 모두 자유를 기반으로 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생애주기에서 삶이 차지하는 의미가 산행에서의 끝없는 오르막길과도 비슷하다. 정상까지 가기 전까지 우리는 끊임없이 부지런하게 발걸음을 옮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역시 눈앞에 놓인 산길은 돌계단이 수없이 이어지다가 끄트머리에선 데크로 만든 계단으로 이어졌다. 사실 이 구간이 관악산 산행에서 가장 거친 축에 속한다.

물론 팔봉이나 육봉 같은 스릴 넘치는 코스는 아니었다. 다만 쉬지 않고 오른다면 심폐활동에 부하가 걸려 최대심박수에 이르기가 무척 쉬운 길이었다.

이 구간을 쉬지 않고 주파하게 되면 가벼운 성취감과 함께 힘든 일은 모두 끝났다는 안도감이 가슴속에 퍼지곤 했다. 그래서 이 길에 발길을 들여놓으면 바로 신발끈을 바짝 당기고 입술을 살짝 깨물게 된다.

모든 힘든 일이 시작하기가 어렵지 막상 시작하면 또 어느 정도는 관성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물 흐르듯이 흘러가게 된다. 험난한 지형을 통과해야 하는 산행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악물고 신발끈을 점검하고 한 발 한 발 옮기기 시작했다. 목표를 분명히 할수록 나아갈 길은 고통이 아니라 수행으로 뒤바뀌게 된다.

눈을 질끈 감을 때도 있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느라 팔을 휘젓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등산객도 가까이서 보면 온 힘을 다해 오르고 있는 법이다.

눈을 들어 보니 어느새 데크로 이어진 계단이 코앞에 있었다. 이 구간만 오르면 아이스크림을 파는 아저씨, 동네 삼촌 같은 아저씨의 쉰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대략 3~5분 정도만 걸으면 아이스크림 아저씨의 모습이 보인다. 호흡을 가다듬고 몇 번 발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 끝이었다.

계단이 끝나는 곳에 어김없이 서 있던 아저씨와 호쾌하게 인사를 나누고선 메로나 하나를 입에 물고 땅바닥에 털썩 앉아버렸다. 좌우에는 가족단위로 올라와 애써 고생한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그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달콤한 시간을 선사함으로써 행복한 결말로 산행을 포장하려는 젊은 부부가 있었다.

그들 곁에 앉아 메로나의 부드러움에 빠져 있었는데 두 남녀의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런데 산에선 들어볼 수 없는 매우 농밀한 대화였다.

"당신은 내게 신비로움 그 자체야. 그래서 내게는 하루하루가 기적 같은 일이야."

난 순간적으로 산우들이 넷플릭스에서 멜로드라마라도 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그래도 꽤 젊은 남녀가 우측 뒤쪽에 앉아 있었다.

고갯짓으로 살짝 살펴본 남자의 눈빛에는 세상에 달콤한 애정은 있는 그대로 모아놓고 그걸 또 정제하고 정제한 채 인공눈물처럼 한 방울 툭 하고 점안한 것처럼 초롱초롱했다. 옆에 앉은 여자는 남자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으로 얼굴을 향한 채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산에서 이 무슨 사랑고백인가 싶었다. 물론 나는 어엿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축복의 성배를 들어주고 싶었다.

여자는 한동안 조용히 있었다. 이때 남자가 조금 긴장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이 드라마는 짝사랑이라고 해석할 수 있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리고 여자가 드디어 남자와 두 눈을 맞추며 가슴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고마워요. 오빠에게 나란 의미가 그렇다니 정말 고마워요. 나도 오빠 많이 좀 좋아해요."라며 수줍은 표정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새삼 이보다 더 부러운 게 없었다. 한 사람의 의미가 신비로움 그 자체라니. 그에게 그녀의 신비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우리에게 신비롭게 다가오는 것들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어떤 사물을 우주의 중심에 놓고 우리 시선의 초점을 그것에 맞추고 있는 건 무엇이란 말인가? 그건 바로 사랑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는 그녀가 지닌 신비의 의미를 자신이 살아가는 우주의 중심에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부러웠다. 그에게 의미로 다가가는 그녀가 놀라웠다. 하지만 나는 다시 일어서야만 했다. 정상까지 갈 길이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그녀의 신비가 그의 내면에 반사되어 눈빛에 영글어 있던 의미를 지닌 채 다시 걸어가기로 했다.

내 삶에서 위기가 닥쳐오던 때는 긴장감이 희미해지고 오만한 시선으로 세계를 마주 볼 때였다. 다시 말해 나에게 긴장감이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하루하루를 비춰주는 희미한 별빛과도 같았다.

난 언젠가 이 긴장감을 초연과 의연으로 맞바꾸고 싶어졌다. 그 여자의 신비로움이 그 자체가 그 남자에게 우주적 중심을 이루고 의미를 발산하는 것처럼.


칠흑 같은 밤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별빛을 붙잡고 걸어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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