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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Nov 03. 2023

관악산에서 마주친 부부들(3)


"아니,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받을 거면 꽉 채워야지 반만 담아 오면 어떡해? 다 식었잖아!"

남자의 목소리가 거칠게 느껴질 정도로 짜증이 가득 차 있었다. 이번엔 남자가 커피를 먹으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자가 뜨거운 물을 보온병에 담아 왔는데 하필 보온병을 가득 채우지 않아 물이 식었던지 불평을 있는 대로 꺼내고 있었다. 바람이 찬 데다가 땀이 식은 옷에 한기가 돌아 제법 추울 법한 날씨였으니 남자가 짜증을 낼 만도 했다.

두 사람을 유심히 보게 된 건 순전히 커피 먹자고 네 번이나 말하던 아까의 그 부부들 덕분이었다. 아까 그 노부부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었지만 약간 더 젊은 축에 속했다.

남자의 성마른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당당했다. 일언지하 대꾸도 없이 조용히 앉아 시선을 멀리 던진 채 경치를 감상하는 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더니 여자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리고 남자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식어버린 커피를 먹고 개운치 않은 입맛을 다시던 남자가 사진을 대충 찍었는지 이번엔 여자가 고레고레 소리를 질러댔다.

"아니, 안 그래도 다리가 짧은데 사진을 찍을 때 다리를 이렇게 잘라버리면 짤뚝거리게 나오잖아. 사진 좀 예쁘게 찍어달라니깐 무슨 못된 심보가 들었으면 이렇게 찍어 놓냐!"

여장부가 따로 없었다.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진 목소리는 조금만 더 컸으면 나무에 앉아 있던 새들이 허공으로 냅다 몸을 피했을 것만 같았다. 그때 나는 우연히 남자의 얼굴을 보았는데 히죽 웃고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고무줄을 끊고 도망치는 일곱 살 개구쟁이의 얼굴과 같았다.


여자는 갑자기 몸을 틀어서 그 주변에 서 있던 내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주고는, "아니 이 양반이 사진을 이렇게 찍어놓았지 뭐예요? 함 봐봐요."라고 했다. 내 눈앞에는 말 그대로 다리가 짤록하게 잘려서 애매한 체형의 여자가 담긴 사진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여자 뒤에서 보고 있던 남자가 해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어서 나도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 입장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인데도 마찬가지로 따라 웃고 있었다.

"인터넷에 검색하면 '여자 친구 사진 예쁘게 찍는 법' 같은 거 많이 나와요. 남편분께 보여드리셔야겠어요."라고 말하면서 나도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두 사람의 얄궂은 사랑싸움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먼저 만난 부부와 다를 바 없이 알콩달콩 살아가는 장년층 부부의 모습을 보니, 마치 정상을 향해 길을 나서는 등산객처럼 하나의 그림이 청사진처럼 아른거리는 것만 같았다.

이제 다시 채비를 챙겨 길을 나서기로 했다. 아직 정상까지는 한참 남았다.

발걸음을 서두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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