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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Nov 03. 2023

관악산에서 마주친 부부들(2)


두 남녀가 쉼터로 빠진 사이 나는 그들을 뒤로한 채 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정상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특히 남은 길은 꾸준한 오르막길이었다. 이런 길은 쉬지 않고 올라야 제맛이다. 2km도 남지 않은 길이지만 이런 식으로 가파른 돌계단이 이어지면 쉽지만은 않다.



대신에 산은 이렇게 쉽지 않은 길을 성큼성큼 오르는 데에 그 재미가 숨겨져 있다. 이건 나만 인정하는 산행의 기쁨이 아니었다. 과거에 산우들과 함께 거친 산을 타고 내려와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그들이 한결같이 고백했던 산행의 즐거움은 바로 그것에 있었다.



좌우간 오르막에 발을 디딛는 순간 방금 스쳐 지나간 장년 부부의 대화가 떠올랐다. 잠시 생각해 본 결과 두 사람 사이가 들리는 대로 그렇게 험악하지는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일단 남자는 자신의 실수를 차마 인정하기 싫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쉬고 싶다는 부인을 따라 쉼터로 빠졌다. 어떻게든 부인을 잘 타이르고 자신의 실책을 어떤 말로든 얼버무린 뒤 목적지인 연주대에 함께 오르려고 달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모르긴 몰라도 남자는 분명 은퇴자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생계를 책임지던 가장의 무거운 책임을 반수동적으로 벗어던지면서 동시에 위엄까지 내려놓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그는 모양새가 빠진 자신의 처지에 하나라도 도 체신없는 일은 작은 일이라도 만들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 뜻에서 보자면 남자가 커피 물을 싸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침묵에 빠져 있던 당시의 심정에 이해의 손길을 뻗을 수 있었다.



커피 먹자고 네 번이나 외치던 부인의 억센 소리에도 지지 않으려고, 기죽지 않으려고 침묵으로 일관한 남자는 젊은 시절 아마도 요샛말로 하면 상남자에 가까웠을 것이다. 가장으로서의 권위로 짐짓 무장한 채 사회에서는 가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직장인이었으리라.



그런 남편과 30년 이상 같은 이불을 덮어가며 살아온 여자는 남편이 종이호랑이 신세로 전락하면서 더 억세진 기운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여자가 지난 30년을 억눌려 살아왔다면 남은 30년은 기를 필 살 차례인 것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의 좋은 부부다. 주말에 산행에 함께 나서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커피 물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볼멘소리에도 여자는 땅을 짚고 서 있던 스틱으로 남자를 위협하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이구, 저 양반한테 시킨 내가 죄인이지."라는 심정으로 쉴 곳을 향했을 뿐이었다. 힘의 균형이 부주라는 작은 사회이자 개인의 역사 속에서 맞춰져 가고 있었다.



이런 생각에 잠긴 채 걷다 보니 어느새 국기봉에 다다랐다. 이곳은 관악산 중에서 나름대로 전망이 꽤 좋은 곳이었다.



동작대교를 가운데에 놓고 좌우로 갈라진 한강이 서쪽을 향해 흘러가는 모습을 멀찌감치 바라볼 수 있는 운치가 있는 장소였다. 운동에 대한 열의와 기쁨도 중요했지만 잠시 서서 풍경을 가슴 안에 담아보기로 했다. 



맑은 하늘에 몇몇 구름이 우두커니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햇살은 쉴 새 없이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에 비해 따스했던 햇살이 콧등을 간지럽히는 찰나에 시야에 들어온 또 다른 부부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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