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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Nov 03. 2023

관악산에서 마주친 부부들(1)


관악산에서 만난 부부들(1)


오늘은 오랜만에 홀로 관악산 산행에 나섰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어제 오전에 내리던 비가 가을에게 자연의 마음을 성큼 내어준 것만 같다. 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요즘엔 등산객의 연령분포가 골고루 분포되고 있었다. 코로나로 인해 젊은이들이 뜨거운 혈기를 풀어낼 곳이 마땅치 않았을 때엔 산길에서 젊은이들만의 화려한 옷차림을 보는 일이 심심치 않게 많았었다.


하지만 드디어 세상은 다시 젊은이들의 무대로 찬란하게 돌아왔다. 반짝거리는 술잔 사이에 젊은이의 의지는 관능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반면에 산길은 조금씩 가을의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봄꽃은 산 아래에서부터 시작했고, 가을꽃은 정상에서 수줍어하며 조용히 내려오고 있었다.


어제의 빗방울이 대지의 열기를 식혔지만 거친 산길을 오르는 동안 흐르는 땀은 여전했다. 구슬땀이라고까지 할 수 없었지만 볼을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산길을 나선 발걸음을 재촉했다.


누런 흙길로 된 비탈길을 지나 검푸른 소나무 숲길을 헤쳐 나아갔다. 얼마간 나아가니 눈앞에 장년층으로 보이는 부부가 앞길을 막아서 속도를 늦추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늦춰진 김에 가만히 두 사람 뒤를 쫓아가고 있는데 불쑥 중년의 부인이 탄성을 내질렀다. "아이고, 힘들어. 저서 커피나 한잔하고 가야겠네."


앞서거니 뒤서거니 나아가던 남편은 들은 채 만 채 제갈길만 가기 바빴다. 남편이 시큰둥해하는 모습에 부인은 연이어 커피타령을 해댔다.


"아 저서 커피 좀 먹고 가자니깐." 짧고 투박한 말투 속에 구성진 사투리의 억양이 끼어들자 조용했던 산속이 시끌벅적해지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약간의 짜증이 섞여 있어서 그런 인상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약간 경사가 있는 오르막길을 걸어가느라 두 사람 모두 숨이 가빠진 터라 단순히 말하는 것조차도 약간의 오기가 없으면 쉽지 않을 일이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마치 귀머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남편의 침묵 때문에 어딘가 서먹서먹해지려는 찰나에 부인은 커피 말고 빵 얘기를 꺼냈다.


"당신은 빵이나 먹고 가던가?" 질문인지 권유인지 애매한 말투였다. 그러더니 또 커피를 마셔야만 올라갈 수 있다고 으름장을 내놓았다. 


"아, 참말로 저서 커피 좀 먹고 가재니깐 듣도 안네." 역시나 구성진 말투였다. 그런데 이번엔 여자 측에서 지친 기색이 느껴졌다.


사실 나무 테이블이 놓인 쉼터까지 가려면 지금까지 올라온 거리보다 조금 더 멀리 올라가야만 해야 했다. 산행이 힘든 건 실제로 걸어가야 하는 현실보다 걸어가야 할 길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는 절망감이 커질 때인 만큼 지칠 만도 했다.


이번이 세 번째 커피타령이었다. 세 번째에도 아무 반응이 없을 줄 알았던 남자가 빵에 관심이 쏠렸는지 "빵 먹으면 무거워져서 못 올라가. 이따 먹어."라고 어자에게 핀잔을 줬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남자의 이 말은 자기 나름대로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이만하면 애매한 상황이 정리될 것만 같았는데 부인은 지지 않았다. 발걸음이 더 지쳐감에 따라 커피를 향한 분명한 의지가 식기는커녕 더 간곡하고 절박해졌다.


"어유, 난 몰라. 당 떨어져서 커피라도 한잔 해야 올라갈 수 있어!"라고 소리치며 이제는 눈앞에 보이기 시작한 나무 탁자에 몸을 던질 기세였다. 부인이 네 번째 커피 타령을 하기 전까지 남편은 그저 바닥에 눈을 내리깔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부인이 커피 먹자고 네 번이나 말하자마자, 그때까지 함구했던 진실의 입이 말문을 열었다. 그것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나 뜨거운 물 안 가져왔는데?" 이것도 반문인지 자포자기식 너스레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애매한 말투였다. 



이건 공구통을 가스버너통인 줄 잘못 가져온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이었다. 공구통은 던져서 이마라도 깰 수 있는데 아예 아무것도 안 가져오면 던져서 홧김을 없앨 만한 것도 없지 않은가.


그러자 여자는 땅이 꺼져라고 한숨을 쉬어버렸다. 그러고선 남자를 옆눈길로 째려보더니 무슨 말을 퍼부울 것만 같았다. 마치 굵은 빗방울이 쏟아지기 전에 무섭게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왜 남편이 그제야 부인의 권유에 묵묵부답을 지켰는지 그 심정을 되짚어보느라 그 뒤에 부인이 남편에게 쏟아붓고 있을지도 모를 잔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쉬기 위해 좌측으로 빠져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두 사람의 목소리도 사라졌다. 다시 또 나는 혼자서 산길을 저벅저벅 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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