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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Aug 10. 2023

9년 만에 처음으로




오늘 아침 9년 만에 처음으로 마주친 하나의 장면이 있었다. 이런 일을 쓰지 않는다면 글이라는 표현 수단의 존재 목적 중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 되고 말 테다.


그러니 나는 과감히 펜을 들어야만 한다.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내 삶에서 매우 단편적인 장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편린조차 내 삶의 한 요소임을 기려야만 한다.


기억이란 건 참 오묘한 것이다. 기억이 없다면 나의 정체성은 순도 높은 향수처럼 뚜껑을 열자마자 공기 중으로 흩어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 어제의 내가 땀을 흘렸다. 땀을 흘렸던 순간순간을 기억하면서 나는 성장해 왔다.


매초마다 380만 개의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그 자리를 매운다. 그렇게 매워지면서 90일만 지나면 며칠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셈이다.


생물학적으로 나란 존재는 90일 만에 다른 존재가 되어버리는데도 우리의 정체성이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다는 건 무엇을 근거로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나의 정체성이란 결국 나의 의식이며, 나의 의식은 기억의 편린들이 누적되어 온 바로 그것이다.

다시 말해 의식이란 것은 지능과 결부된 것이 아니라 경험과 결부된 것으로써 존재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그 무엇이다. 지능이 없다고 해서 의식이 없지도 않으며, 정체성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다만, 모든 것을 다 기억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기억들만 붙잡고 있으면 될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오늘 아침의 그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해 둘 만한 일이었다. 나에게 책이 주는 의미가 남다르다는 점뿐만 아니라, 다 같이 독서에 참여한다는 점이 인류애까지 불러일으킬 정도로 내게는 의미심장하다.


직장인들에게 출근길은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다. 심지어 지하철로 통근할 땐 열차를 타는 문까지 매일 똑같기도 하다.


나 또한 유별나지 않은 직장인이라 어제와 오늘의 아침 풍경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역사로 들어온 지하철 문이 열리기 전까진 적어도 그러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열차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내 눈길은 너무도 익숙한 하나의 사물에 머물며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것은 젊은 남자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의 표지였다.


에메랄드 빛 물결 위 세 척의 배가 한 곳에 머물며 한적한 분위기를 한껏 드러내고 있었고, 거기에 시선을 빼앗길 찰나에, 바다 위에 펼쳐진 살구빛 구름들,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수평선 너머로 자신을 모두 감추지 못한 덕분에 그 영광스러운 은혜가 여전히 눈부신 햇살을 쏟아내고 굴절되면서, 마치 화가가 저녁노을을 그리기 위해 살구색 물감에 보라색과 분홍색을 군데군데 섞어 구름을 칠한 것만 같은 그 하늘이 조용한 눈길로 나의 시선과 눈 맞춤을 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이토록 몽환적인 색채를 물씬 풍기고 있는 저녁의 동해바다가 그려진 책 표지에 나의 온신경이 쏠리자마자 내 마음속에서는 반가움이 일으키는 작은 희열이 샘솟듯 흘러나오고 있었다. 반가움을 넘어선 희열이라고까지 생각하게 된 데에는 그의 나이가 젊다는 점이 한몫을 했다.


더군다나 그는 지금 내가 한참 빠져 있는 소설인 최은영의 "은 밤"을 읽고 있었다. 9년 만에 처음으로 지하철에서 같은 책을 읽고 있는 남자를 마주친 나는 작은 희열에 휩싸인 채 오늘의 일기를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와 나는 1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채 같은 공간에서 같은 소설을 읽으며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최은영 작가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그도 작품세계에 머물러 있느라 자신의 근처에 낯선 사람이 자신이 현재 경험하고 있는 세계에서 똑같이 거닐고 있는 줄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9호선 급행열차가 사람들을 토해내느라 입구에 서 있던 그가 책을 덮고 나서야, 내가 그를 처음 봤을 때 놀란 눈으로 바라본 것처럼 놀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이로운 순간에 빠진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지만 나 또한 최은영 작가의 친절한 목소리에 정신을 의탁하고 있느라 그의 시선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에게 가벼운 눈짓으로 책 읽는 사람으로서의 동질감을 표현해주지 못한 점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그도 최은영 작가의 매력에 충분히 빠져 있었던 만큼 그러한 나를 분명히 이해해 주었으리라 믿는다.


만약 그가 다음 독서토론 때 우리 모임에 등장하게 된다면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은 사람처럼 마냥 반가워하며 그에게 먼저 손을 내밀리라. 손을 내밀면서 우리는 처음 만난 게 아니라 이미 며칠 전 밝은 아침에 희령이라는 동해안의 작은 도시에서 지연이의 얘기를 듣기 위해 한자리에 있었다고 말해주리라.


이처럼 희귀한 인연은 언제나 삶의 긍정적인 자극으로써 기억에 깊이 새겨진다. 나와 이름이 같은 사람이 한 공간에 존재할 때 다른 사람이 "엘스테르 씨"라고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동명이인이 동시에 이름을 부르던 사람을 쳐다본 순간처럼 영원히 기억 속에 도끼로 각인된다.


그것도 마음에 흔적을 남기는 호소력 짙은 매력이 넘치는 소설로 다가온 우리의 밝은 밤을 읽고 있던 그 장면이 새록새록 추억으로 남으리라.


최은영의 밝은 밤을 읽고 있던 그가 번잡한 역에서 환승하기 위해 내렸다. 3개의 지하철 노선이 만나는 곳으로 그는 분명 다른 지하철로 갈아탔으리라.


쏠려 들어오는 인파에 밀려 구석으로 저절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자리를 옮겼는데 갑자기 옆에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더니 이번엔 젊은 여자가 책에 열중하던 나를 살펴보고 있던 눈치를 감추느라 애쓰고 있었다.


그러더니 곧 자신의 에코백에서 에세이 집 한 권을 꺼내더니 종이 위로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한 사람의 독서가 주변으로 퍼져 의도치 않게 독서인구수를 늘린 셈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업무 시간이 시작되기 전인 8시 59분까지 책을 읽고 있던 나의 모습이 내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 팀장과 선임 차장 그리고 옆팀 팀장이 책을 읽기 시작했던 당시를 회상했다.


한 사람의 독서가 서너 권의 책이 읽히도록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런 모습이 못 마땅했던 부서장은 독서 전파자인 나를 내쳤다.


내가 떠나면서 부서에서는 더 이상 책을 읽는 모습은 관찰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가장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부서의 장이 독서를 권장하기는커녕 싹을 잘라 버린 셈이었다.


부서장은 매일 BBC 뉴스를 핸드폰에 띄어놓고선 직원들에게 그 모습이 보이도록 일부러 화면을 켜놓곤 했다. 헤르만 헤세가 독서를 위해 가장 경계했던 것이 바로 신문이었다.


신문을 읽는 사람은 신문을 읽음으로써 현재 세계가 돌아가고 있는 중심화제에 마치 자신이 직접 동참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들기 때문에 정작 정신적 삶을 위해 가장 필요한 독서를 등한시한다면서 독서에 가장 강력한 적을 신문이라고 규정했다. 그러고선 신문은 하루만 지나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읽히지 않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면서 신문 읽기의 위해성을 목소리 높여 강조했다.


결국 신문을 읽는 사람은 자신을 위장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그가 지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신문을 읽는 사람은 마치 자신이 세상에 돌아가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착각은 매일 읽는 신문부수가 누적되는 동안 위선자가 되기 십상이고 지적인 완고함에 파묻혀 결국 오만한 사람이 되고 만다.


그러나 신문은 절대로 지적인 삶을 완수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독서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지만, 신문은 세상을 오려내는 가위에 불과하다. 그것도 오려내는 사람의 편견과 오만이 섞인 채 세상사람들에게 퍼나른다.


헤르만 헤세의 가르침을 받기 전에도 신문을 멀리했지만, 그 뒤로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신문 기사를 작성하는 사람에 대해서 면밀히 검토해 봐도 실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도 나와 똑같이 대학을 나오고 저널리즘이라는 사명감에 불타 신문사에 입사한 직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들이 저널리즘에 불타오른다 한들 그들에게서 세상을 바르게 이해하고 참고할 만한 통찰을 가진 관점을 기대한다는 건 무리였다.


그만큼 진리에 이르는 길은 힘들고 고난으로 가득 찬 길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만일 진리가 그토록 발견하기 쉽다면 어떻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못 본 채 지나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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