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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각형 Nov 20. 2023

오징어 게임

모든 시대의 지배관념은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2021년 가을 코로나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을 때 번개처럼 찾아온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불러일으킨 센세이션은 굉장히 강렬했다. 이런 오징어 게임의 성공요인을 대중문화평론가들은 여러 가지에서 찾아냈다.

그들이 찾아낸 단서는 사실 대중문화평론가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얘기였다.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각각의 게임들이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쉽기 때문에 시청자들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둥 여러 가지 단서들을 찾아냈다.

나는 이러한 그들의 발견을 다시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노고를 칭찬하기 위해 지면을 할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시청자들이 12시간 동안 경험한 것을 A4 용지 한 장으로 요약한 것에 불과하다.

오징어 게임이라는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의 구조를 파악함으로써 해석의 명증성을 확보해야 한다. 작품의 구조는 화자가 말하고자 한 내용이 놓여진 배열을 파악하는 일이다.

모든 작품의 형식은 내용이 결정한다. 그것이야말로 작가가 작가로서 남기고자 하는 유일한 것이기도 한다.

같은 내용이더라도 어떤 형식을 취하냐에 따라 작품이 주는 의미와 그에 따른 감상이 판이하게 달라진다. 문학장르도 결국 내용에 따라 취하게 되는 형식이 어떤 갈림길을 따라 흘러가게 된 것뿐 원천적으로 갈라진 것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

술에 따라 어울리는 잔이 있듯이 문학 또한 내용에 따라 어울리는 형식이 있을 뿐이다. 드라마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18세기가 소설의 시대라면 20세기 이후로는 영상의 시대로 접어든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각 시대에는 시대적 문제가 존재하며, 그러한 시대적 요구에 가장 적합하고 가장 잘 부응하는 수단 또한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평론적 방법론은 오징어 게임을 이해하는 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징어 게임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알기 위해서 작품의 내용이 취한 형식을 살펴봐야만 한다.

이런 관점으로 보자면 오징어 게임이라는 드라마는 미괄식 구조를 취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결말 부분에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은 그 말을 하기 위함에 불과하다. 시장이 반찬인 것처럼 식사를 하는 목적은 허기를 없애기 위함인 것처럼.

드라마는 게임의 설계자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끝나버린다. 그는 바로 460억 원의 돈에 대한 탐욕을 드러낸 모든 사람들 옆에 있었던 1번 참여자였다.

1번 참여자는 뇌종양이라는 병을 앓고 있던 80대의 노인으로 마치 더 이상 삶에 대한 미련이 없기 때문에 불편한 몸으로 목숨을 걸고 거금을 노리는 게임에 참여하는 타당한 이유를 갖고 있게끔 시청자들을 현혹시켰다. 그런데 정작 그가 바로 그 게임의 설계자였다니 얼마나 아이러니한 결말인가?

그전까지의 영상은 원색이라는 물감을 통해 자본주의의 참혹한 현실을 담아냈다. 뺏고 뺏기는 아수라장 같은 상황 속에서 때로는 약자끼리 힘을 합치고 난관을 헤쳐나가는 의기로운 모습도 그려냈다.

하지만 여전히 참여자들의 퇴로를 가로막고 있던 피폐한 현실은 상금이 쌓여갈수록 멈출 수 없는 탐욕으로 이끌고 갔다. 심지어 불이 꺼지면 참여자들끼리 목숨을 노려 상금을 불려 나갈 수도 있었다.

법률이나 치안 또는 행정과 의료시스템이라는 보호장치는 헛된 구호에 불과할 정도의 생태계였다. 대신에 그들에게는 누구나 똑같은 출발선에 서 있게 했다는 평등이라는 공고한 가치를 부여해 주었다.

그토록 정글 같은 곳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는 마지막 장면에서 놀라운 일을 겪게 된다. 그러한 생지옥에서 함께 생사를 걸고 뛰던 사람 중에서 가장 나약했던 인물이 바로 그 설계자였기 때문이었다.

주인공도 그 장면에서 오열하면서까지 화를 내고 분노를 표출했다. 이 드라마의 결말이 그만큼 가장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에 이르기까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서민들이 겪는 애환을 보여주었지만 게임 참가들은 탐욕에 눈이 멀어 그 게임의 설계자가 누구인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물론 게임의 부당함은 일부 참가자들 사이에서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 정도로 쉽게 알 수 있는 맹점의 일부였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 앞에 놓인 운명 앞에서 생존에 대한 관심에 몰두한 나머지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거대한 파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았다. 바로 이 지점까지가 시청자 중 그 누구든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오징어 게임의 스토리다.

그러나 만약 게임의 설계자가 있었다는 사실을 456명의 참가자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알고 있었다면 극의 전개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더군다나 설계자는 삶의 마침표를 찍기 직전에 있던 나약한 노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455명은 충분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작가의 의도가 드러난다. 극 중에 꼭꼭 숨겨놓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낸 것인데, 70억 인구 중 자본가가 차지하는 비중이 극소수인 점을 나약한 노인으로 설계자로 비유했던 것이었다.

칼 마르크스의 말대로 모든 시대의 지배관념은 지배계급의 관념이다. 그런데 그 지배관념에 우리가 굴복해 있지만 정작 우리는 누가 지배계급인지 정확히 일지 못한다.

하지만 자본가는 우리 서민들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도 우리처럼 자본주의 사회에서 똑같이 필수품에 의지하고 길거리를 활보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그들이 우리와 다른 건 운명의 장난에 의해 우리보다 가진 게 많을 뿐이지만, 그들 스스로 설계한 왜곡된 구조에서 그들은 언제나 우리보다 유리했다. 오징어 게임은 단지 우리가 살아가는 애환을 그려낸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설계한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설계자들은 자본 없이는 나약한 존재에 불과하단 것을 그려낸 작품이다.

나의 검색 능력이 부족했던 것인지 대중문화평론가들이 오징어 게임의 성공 요인에 대해 분석하면서 이러한 내용을 언급한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대중문화평론가들이 일부러 눈을 감아준 것인지 아니면 어차피 한 번 기울어져 왜곡된 구조를 바꿀 수 없기 때문에서였는지 모르지만 이에 대한 언급은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자신을 발견했다. 대자연속에서 벌거벗은 자신을 발견했다.

다시 말해 아담은 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선악과의 영향으로 대자연속에서의 자기 자신의 위치와 자연과의 관계망을 인지하고 의식하게 되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모피어스가 네오에게 빨간약과 파란약을 건네준다. 빨간약을 삼킨 네오는 베일에 가려진 현실에서 눈을 뜨게 된다.

주어 담지 못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나의 글은 공소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이 글을 쓰는 내내 적지 않게 쓸쓸하고 적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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