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매몰차게 윙 소리를 내며 대기를 갈랐다. 냉기가 두꺼운 롱 패딩을 뚫고 뼈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를 피해 따뜻한 집안의 온기를 찾아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추운 겨울이 되면 나는 가끔 하얀 목련이 따스해지기 시작하는 봄 바람과 소리 없이 내리는 가랑비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봄날의 어느 오후를 생각하곤 한다.
정확하게 몇 년 전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미국 출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보니 완연한 봄이 와있었다. 세상 구석 구석에 꽃이 피었더라. 바람은 조금 차가웠지만 산뜻했고 무엇보다도 햇살이 따뜻했다. 봄이 똑같은 일상과 풍광을 좀 더 아름답게 바꾸어 놓았다.
동네 앞 길가에 흐뜨러지게 핀 벗꽃 나무 밑둥치를 감싸고 환하게 웃는 아이를 보면서 아이 엄마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봄의 정령은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었다.
시차 적응이 잘 되지 않았었는지 잠을 오래도록 잤었다. 오후 네시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저녁에 다시 깼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어 다음날 아침까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아무것도 먹질 못했는데도 그렇게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마도 정신적으로 피곤했던 육체는 먹는 것을 그리 중하게 생각하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나는 매일을 공허함과 싸워야 했다. 끊임없이 이어진 일과 출장의 반복으로 공허함이 내 속에 석순처럼 자라났다. 그래서 나는 잠 속에도 꿈을 쫓으려 했던 것 같다. 그래서 꿈을 많이 꾸었다. 내가 만나고 싶었던 사람, 예전에 알고 지냈던 사람, 처음보는 허구의 사람까지...그 속에 내가 있었는지만 존재가 불확실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
다시 새벽에 깼다. 눈을 떠 보니 새벽 4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세상은 빛을 전부 잡아먹고 달의 빛도 다 씹어 삼켜 버렸는지 세상은 어둑어둑하고 소리마저 가라앉아 있었다. 대지가 입을 벌려 빛과 소리를 모조리 흡입하여 입 안 가득히 머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제서야 배가 고파졌는지 라면 하나에 시원한 맥주 한 캔을 따서 마셨다. 나라는 인간의 영혼도 배가 불러야 맑아지는 법이라 생각하며 말이다. 다시 잠을 청하려 누워 보았지만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너무 많이 잔 탓도 있지만 그것보다 대지가 입을 벌려 대기 위의 빛과 소리를 다시 토해내는 장관을 보고 싶은 욕망이 살며시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기어나오고 멀리서 빛이 밝아오면서 어둠이 빛으로, 죽음이 생명으로, 침묵이 소란으로 바뀌어 가는 그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새벽까지 한 껏 웅크리고 있던 꽃망울들이 터진다. 오므리고 있던 꽃 봉우리가 한 순간에 '탁'하고 터지는 것이다. 새벽과 아침의 경계도 그런 것이었다. 바로 그 순간에 동이 터올라 또 하루의 세상이 '탁'하고 태어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