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세상을 보는 눈을 통해 어른들의 세상을 다시 들여다보기.
나는 조금씩 추운 날씨와 세찬 바람을 이기는 방법을 터득해 갔고, 도보의 속도가 붙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자들과 점점 멀어지고 더 이상 그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된 후 드디어 숙소에 도착했다.
신뚜치아오라는 마을은 지극히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이었다. 여느 티베트의 마을처럼 저 멀리 하늘까지 치솟은 설산 사이에 그나만 좁게 난 평지에 작은 강을 중심으로 건물다운 건물들이 가로수와 함께 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곳이었다. 마을을 바로 감싸고 있는 민둥산은 햇볕하나 가릴 수 있는 수목 하나도 없이 모두가 겨울철의 황량한 황토색 잔풀로만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거기 산 중턱에 길을 지나가는 누구나 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하얀색 글씨로 티베트말로 '옴마니밧메움'라고 쓰여 있었다. 티베트에서 가장 많이 보았던 글이 바로 저 말이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티베트어로 내가 직접 쓸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계속 걸어왔기 때문에 씬두치아오에서는 삼일 정도를 쉬기로 했다. 그 누구도 라싸에 빨리 가고 싶어 하지는 않았다. 다만 라싸로 가는 그 길을 즐길 뿐이었다.
씬두치아오의 숙소 역시 장족 가정의 집을 개조해서 만든 민가였다. 장족 집의 일층은 가축의 우리나 창고로 쓰이지만 이 집은 아예 그런 것들을 모두 치워버리고 그곳에 침대가 여럿 있는 방 두 개를 만들어 여행자들에게 편안한 숙소를 제공했다. 늦은 오후에 도착하였기에 일단 모두가 읍내로 나가 식사를 했다. 간단한 면과 만두를 먹고 읍내에 있는 조그마한 시장에 들러 모처럼 발견한 싱싱한 과일과 필요한 물품들을 산 후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여행객들에게 집주인아주머니는 따뜻한 수유차를 대접해 주었다. 수유차는 티베트인들의 생명수와도 같았다. 그렇게 잠시 따뜻한 차를 마시며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학교에 갔던 그 집 아이들이 우르르 돌아왔다. 모두 네 명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처럼 밝고 순수하다. 티베트 고원 마을 숙소에서 만난 이 아이들도 그랬다. 어른들이 가지지 못하는 순수함과 친절함과 연약함에 우리네 어른들은 늘 빚을 지고 사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새로운 손님들이 자기 집을 방문한 일이 아이들에게는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었던지 아이들은 한 마디 말과 작은 소란에도 깔깔대며 웃고 떠들었다. 누군가 사탕과 초콜릿 몇 개를 조심스레 건네주니 아이들의 얼굴이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환해졌다. 보잘것없고 단순한 달달함 앞에 표정이 터져버리는 저 순수함이란... 어른들은 부러워한다.
아이들은 학교에 갈 때마다 입고 다니는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은 주인아주머니의 눈치를 보더니 하나같이 가방을 내려놓고 노트를 꺼내서 그날의 숙제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아이들의 노트를 보고서 장족 아이들이 학교에 가서 무엇을 배우는지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장족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하자마자는 제일 먼저 자신들의 언어인 티베트어를 배운다. 그리고 동시에 중국어를 배웠다. 중국에 살고 있는 보통의 장족 노인들이나 산골에 살고 있는 무식자들은 중국어를 읽거나 쓰지 못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은 중국어로 가능했다. 한족 문화가 티베트 문화를 점점 잡아먹고 있던 것이다.
어쨌든, 내가 가서 보니 아이들이 하고 있는 숙제는 주로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장족어로 된 국어 숙제였고, 또 다른 하나는 중국어로 된 수학 숙제였다. 그런데 아이들은 전부 작은 연필 하나에 단 하나의 공책에 모든 숙제를 하고 있었다. 내가 왜 공책 하나에 숙제를 같이 하냐고 물어보니깐 아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공책이 없어서 그런다고 말했다. 아직도 이곳은 공책이 부족하다고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아이들이 숙제를 하는 동안 저녁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들어갔고, 거실에는 네 명의 아이들과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이 있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나이와 이름을 물어보았다. 학교생활은 재미가 있는지, 학생들은 한 반에 몇 명인지, 공부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은지 등등,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나는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면서도 여러 가지 질문에 던졌고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질문에 순순히 중국어로 대답해 주었다. 보통 8시에 학교에 가서 12시까지 수업을 듣고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는다고 했다. 이곳의 모든 아이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고 오후에 다시 학교에 간다고 했다. 학교에서 단체 급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다시 학교로 가는 것이 참으로 중국화 된 학교 생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티베트인들의 교육 환경도 이렇듯 이미 완전한 중국화가 되어버린 것이었으니.
아이들의 숙제가 거의 끝날 때 즈음에 아이들의 저녁 식사가 차려졌다. 주인아주머니가 한껏 솜씨를 뽐낸 티베트식 야크 고기 찜과 중국 음식 몇 가지였는데 아이들은 배가 고팠는지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이들이 밥을 먹는 동안 아까 사다 놓은 맥주를 홀짝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노래 한 소절을 읊조리게 되었다. 안재욱이 불렀던 '친구'라는 노래의 원곡이 중국어로 된 노래였는데 내가 한국 사람이라서 그런지 이 여행을 통해서 서로가 진한 우정을 나눈 친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 노래의 후렴 부분이 시작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같이 후렴을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렴을 다시 한번 반복하다 보니 서로 하나가 된 듯한 그럴싸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렇게 다시 노래가 끝이 나자 주인아주머니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손님이 이렇게 멋진 노래를 들려주었는데, 저희 딸아이가 노래 솜씨도 보여 드리지요.”
그러고는 아이들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한 소녀가 수줍은 듯이 일어나 우리들을 향해 티베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든 티베트인들이 사랑하는 '포탈라 궁'이라는 노래였다. 순수한 아이가 가벼운 소리로 부르는 티베트의 노래란, 정말로 사랑스러운 바람 소리와도 같았다. 소녀가 부르는 노래인데도 바람처럼 가늘고 구성진 가락과 시시각각 변화하는 음정들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고원의 바람 소리를 듣는 것만 같았다. 그 아이는 정말 노래를 참 잘했다.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감고 티베트어로 부르는 노래는 무반주였지만 그 어떤 화려한 음악보다도 아름답고 신비로웠다. 그들의 노래는 대부분 라싸의 포탈라 궁이나 자신들을 지켜주는 보살들이나 전설에 관련된 내용들이었다. 그 아이가 불렀던 노래의 가사도 자신들을 지켜주는 것은 바람처럼 불어오는 보살의 보호하심과 위대한 자연의 아름다움 같은 것들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부르는 가느다란 목소리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고 단번에 이방인 여행자였던 내게 새로운 공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아이의 노래가 끝나자 모두들 환호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는 주인아주머니께서 말씀하셨다.
“그럼 저도 하나 보여드리죠. 저희 장족의 전통 춤인데 노래를 부르면서 이렇게 추는 것이랍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구성진 목소리와 흥겨운 가락에 절도 신이 났다. 아주머니가 춤을 추자 옆에 앉아 있던 다른 가족들도 일어나 함께 춤을 추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우리들도 함께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불빛도 약하고 시끄럽고 흥겨운 반주도 아니었지만 마음과 마음이 하나 된 노래와 춤은 민족과 언어와 문화를 넘어 사람과 사람을 서로 마주하게 했다. 작은 티베트 소녀의 노래 속에 담긴 순수함은 몸과 마음이 지친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나는 그러한 틈 속에서도 창밖으로는 고요한 별빛이 무수히 쏟아지고 있는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기쁨이 넘쳐나고 즐겁고 기쁜 밤이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가자 모든 춤과 노래가 끝이 나고 아이들이 제일 피곤함을 느꼈던지 하나둘 먼저 잠을 자러 가버렸다. 그러나 어른들은 따뜻한 난롯불에 모여 앉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밤이었다. 수유차를 마시며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먼저 주인아주머니에게 궁금했던 것을 몇 가지 물었다.
“아주머니 궁금한 것이 있는데, 보통 다른 장족들 가정을 보면 아이들을 두 명에서 세 명 정도가 보통인데 아주머니 집은 아이들이 네 명이나 있더군요.”
그러자 아주머니는 춤과 노래를 부를 때의 기쁨과 흥분을 가라앉힌 차분한 목소리로 옛날의 기억을 되살리려는 듯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게 사실은... 두 명은 제 아이들이 아니에요. 제일 큰 여자애와 두 번째 큰 여자애 두 명이 제 자식이고 나머지 두 명은 제 자식이 아니랍니다.”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던 대답이었다.
“그럼 나머지 두 아이는 누구 아이들입니까?”
“제일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 아이는 사실은 예전부터 자신이 알고 있던 친구의 자식들이에요. 원래는 이 동네에서 어린 시절부터 같이 자랐는데, 결혼하고 이 애들 둘을 낳고 살다가 원래 가진 집이나 땅도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저희한테 잠시 맡기고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나간 것이 벌써 3년이 넘었네요.” 중절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시 물었다.
“그럼 저 아이들 부모는 자주 오나요?”
“아니요.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소식조차 끊어져버린걸요.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판에, 그렇다고 저 어린애들을 내팽겨 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래서 그냥 저희 집에서 키우는 거죠.”
그들은 내가 얼핏 보아도 넉넉지 않은 형편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겨울이라 여행 비수기이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더욱 적을 때이고 하니 이 가정의 수입이 그리 많지 않을 것이 확실했다. 그런 걱정을 하다가 아까 아이들이 공책하나에 몽당연필로 숙제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주머니에게 다시 물어보았다.
“아주머니 조금 전에 제가 보니깐, 아이들이 학교 숙제를 하는데 전부 공책 한 권에 숙제를 하고 있던데 여기서는 원래 그렇게 숙제를 하는 가보죠?” 주인아주머니는 안타까워하는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게 아니라 공책이랑 연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 권에다가 숙제를 하는 거지요. 그리고 숙제를 다 한 공책은 지우개로 지워서 다시 쓰는 것이에요. 저희 집안 형편이 네 아이의 모든 학용품을 사주기는 힘들거든요.”
너무 어린아이들은 가난이라는 것을 잘 모를 수 있다.
아직은 너무 어려서 자신의 가난함을 가난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뿐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다 똑같은 상황이라 이미 그 삶이 보편화되어 가난이라는 기준이 없어져 버린 것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나는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떤 아이들은 태어나는 순간 자신이 태어난 나라와 부모와 환경에 의해 가난과 질병과 전쟁의 위협을 물려받는다. 아이들은 그러한 모든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에서 태어나 살게 된 것뿐. 이 외에 다른 이유는 없다. 단지 세상과 단절된 이곳 티베트의 작은 산골 마을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고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이곳뿐만 아니라 세상의 많은 곳이 비슷한 상황일 거다.'라고.
과연 세상은 아이들에게 태어난 그 순간부터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무어라 확실한 답을 내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런 아이들을 조금이나마 도와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것뿐이었다.
대화를 끝내고 시간이 많이 늦었기 때문에 모두들 잠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 방으로 돌아가 잠시 생각에 잠겨 내가 내일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러자 웃고 떠들며 춤을 출 때와는 달리 뭔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날,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서기 전에 읍내에 가서 아이들이 사용할 노트와 연필, 필통 등등을 한가득 사서는 주인아주머니에게 아이들이 준 선물에 대한 작은 보답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분명 아이들이 학교에 갔다 와서 새 노트와 연필을 받고서 좋아라했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