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가 필요한가요?
요새의 아이들은 결핍을 모른다고 한다. 형편이 나아지기도 했고, 부모들은 자식을 많이 낳지 않고 최대한의 지원을 다 해준다. 하다못해 간식을 해줘도 넉넉하고 남기게 해주니 아이들이 결핍 없이 자라고 있다고 한다. 적당한 결핍이 아이들의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하는데 적당한 결핍의 선이 어느 정도일까?
중학교 시절 아빠의 사촌동생인 삼촌네 집에서 하숙하기 전에는 20분 거리의 학교로 통학을 했다. 그렇게 아침저녁으로 20-30분 엄마 차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을 갔고 학원이 끝나면 엄마랑 함께 집에 갔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달랐지만 주로 엄마는 그때도 듣기만 하셨다. 다른 형제를 욕하는 또 다른 형제. 또 그 다른 형제 등등..
아빠의 사업이 망해서 어쩔 수 없이 아빠의 고향으로 내려갔고, 시어머니를 살면서 지독하게도 시집살이를 많이 당했던 엄마는 애환이 많았다.
아직도 시금치처럼 “시” 가 들어간 음식도 드시지 않을 정도면 그 고통이 조금은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그 통화 소리를 늘 열심히 들었다. 우리만 피해자가 된 것 같았고 오히려 이렇게 싸우기만 할 형제들이 나는 없어서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했다. 내게 형제는 그런 존재였다. 있으면 짐이 되고 싸우기만 하는 사람들. 남보다 더 못한 존재들
엄마의 시집살이는 내가 다 적을 순 없겠지만 모든 형제들에게 무시당하고 이용당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아빠가 돌아가신 후 돈 빌려달라는 연락을 제외하곤 연락하지 않고 지내는 아빠 형제들의 근황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나에게 자식을 여러 명 키운다는 것? 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숙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왜 양보를 해야 하는 거지?
하는 의문 들은
내가 자식을 차별 안 할 수 있을까?
의 생각을 거치면서
이렇게 할 거면 자식을 왜 많이 낳은 거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원망들이 만들어낸 자아일까.. 외동이라서 너무 행복해하던 내가 처음으로 내가 “아 형제가 있었더라면” 싶었던 건 아빠 장례식 이었다.
내가 혼자 자라면서 엄마가 친구가 되어줬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외롭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든든한 지원군이 없는 것처럼 외로움을 아예 못 느낀 것은 아니니깐. 우리 아이에게는 어떤 결핍을 주는 게 맞는 걸까.
동생과 살면서 나눠야 하는 양보의 마음 결핍일까
부모가 채워줄 수 없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결핍일까
여전히 다둥이 엄마들은 아이가 둘 이상이면 스스로 자란다고 말한다. 물론 하나보다 키우기 쉽다는 뜻이겠지만 자신이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냥 아기 낳고 키우는 거 남들도 다 하는 건데라고 말하면 할 말 없지만. 오히려 아이를 낳아보고 키워보니 여럿을 키운다는 건 외동으로 키우는 것보다 더 어렵고 더 막중한 책임감이 필요한 거 같다.
나는 살면서 제일 준비를 많이 하고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 게 아이를 낳고 기르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배운 이론처럼 되지는 않지만 최대한 많은 이론을 알고 아이와 나에게 최선의 방법으로 최고의 행복한 아이로 키우는 게 가장 큰 숙제이지 않을까.
나는 몇 살까지 둘째에 대한 고민을 할까? 문득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