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싫어했던 부모의 행동을 내 아이에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유난히 견딜 수 없는 내 아이의 자질이 있습니까?
칼 융은 분명 본인의 인격 중 일부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어 의식화되지 못한 또 다른 나를 '그림자 (Schatten)'라고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이유 없이' 화가 나고 불안이 올라오는 아이의 모습이 있다면 그것은 외면하고 싶은 나의 '그림자' 일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나의 그림자가 내 아이의 모습에서 발견될 때 그 이유를 의식하지 못한 채 아이를 다그치면서 '부정하고 싶은'모습을 '없애려'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아이는 사랑받기 위해 부모가 싫어하는 인격을 무의식에 억압하게 됩니다.
없애려 했던 모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그림자'가 되는 것이죠.
결국 나의 그림자를 내 아이에게 물려주게 되는 셈입니다.
그림자를 악하고 나쁜 측면이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림자는 인격 전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단지 시대나 사회가 만들어 놓은 윤리와 부모가 만들어 놓은 가치 기준에 의해 '옳은 것'이라 선택받지 못한 외면된 인격과 감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옳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고 의식화하지 않은 채 살아가며 자기도 모르게 자녀에게 물려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온전한 전체의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아이 역시 개성적인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림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나도 모르게 부모에게 물려받은 그림자를 어떻게 다시 내 아이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의 아버지는 내게 늘 '두각을 드러내야 한다'라고 하셨다
많은 사람들 속에 두드러지고, 먼저 나서고, 자기주장을 할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수업 시간에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발표하는 것, 학급 대표가 되는 것,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은 아버지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자질이었기에 칭찬받았다.
한편, 낯선 사람 앞에서 수줍어 엄마 치맛자락 뒤에 숨는 날이면 집에서 꾸지람을 들었다. 내게 조금의 소심한 모습이 발견되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고쳐주려'하셨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나는 외향적이고 나서길 좋아하며 자기주장이 강한 인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모습이 '옳은 것'이라 여겨졌고 '나의 성격 전체'를 설명한다 생각했다.
상대적으로 내향적인 인격은 '그른 것'이 되었다. 나서지 않고 듣기만 하는 사람은 나와는 정 반대되는 사람이며 내가 그런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향적인 인격은 아버지의 그림자였다
아버지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하지 않는 노부모와 6명의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기에 강한 리더십으로 집안을 이끌고 어떻게든 돈을 벌었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 많은 사람들 중 가장 우수할 수 있도록,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셨다.
문학을 음미하던 소년이었지만, 치열한 삶을 살아가는 가장에게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 조용히 물러나 있는 것. 내향적 인격은 옳지 않았기에 무의식에 억압되어 그림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딸의 행동에서 자신의 그림자가 투영되었을 때 '이유 없이' 불안하고 화가 나서 딸을 타이르며 그런 모습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분명, 첫 딸을 사랑하기에 '좋은 의도'로 아버지는 본인이 '지향하는' 인격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지만, '혼자서 사색을 즐기고 상황을 관조하는' 아버지의 내향적 그림자는 내게 물려지게 되었다.
부모의 그림자를 물려받은 아이들은 어느 날 부모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기의 정체성을 찾고 싶어 진다.
그러나 부모의 영향이 너무나 막강했을 경우 아이의 자아는 부모의 자아와 너무 닮아 있기에 '자기에 대한 숙고'가 더욱 어려울 수 있다.
'부모에 대한 저항심'을 동력으로 부모가 원하는 방향과 '정 반대로 행동'하거나 자아를 '방어'하는 것을 '정체성을 찾는 것'이라 착각할 수 있다.
만일 내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그림자가 있다고 느껴진다면 혹은, 내 아이에게 나의 그림자를 물려주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 그림자를 외면하기 위해 투쟁했다
늘 우수하고 두드러지는 것은 내게 점점 버거운 일이 되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내게 실망하고 화를 내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에게 화가 나면서도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나 자신이 미워졌다.
때마침 찾아온 사춘기의 나는 "나의 정체성을 찾겠다!"라고 선언했다. 아버지에 대한 최대의 반항은 공부를 아예 포기하고 처절한 결과의 성적표를 갖다 드리는 것으로 '우수하게 두드러지는'것과 정 반대의 결과를 보여드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우 어색하고 지질하게 '노는 척'을 하는 것이었다.
당시엔 몰랐지만 10대의 내 행동은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이 아니었다. 그저 아버지가 원하는 것과 '정 반대로 행동'하는 *반전 현상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아버지에 대한 반항심을 '*피학적 공격'의 형태로 표출하는 것이었다.
성적이 떨어지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아버지를 속상하게 하며 간접적으로 공격했던 것이다.
*반전 현상: 억눌렸던 성격이 서툴고 어색하게 튀어나오는 것.
*피학적 공격: 나의 작은 손해를 감수하면서 상대에게 더 큰 손해를 입히며 공격성을 표현하는 것.
아버지와 너무 닮아버린 나
고3 시절 부산 집에서 최대한 멀어지겠다는 일념 하나로 노력해서 가까스로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지금부터 나만의 삶, 새 삶을 살겠다."
내게 있어 나만의 새 삶을 사는 방식은 '클럽 가기, 늦게까지 술 마시기, 짧은 치마 입기...'보수적인 아버지 때문에 해 보지 못한 것들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큼 '나도 모르게' 교수나 선배들에게 적대적으로 대했다. 대 놓고 공격하진 않았지만 비 협조적이고 눈에 거슬리게 구는 방법으로 적개심을 표출했다. 그 결과로 나는 재수 없는 후배라는 딱지를 달고 올~에프, 학사경고도 받아 졸업하기까지 꽤나 애를 먹었다.
이 시기의 삶이 '나만의 새로운 삶'이라는 것은 나의 큰 착각이었다.
물리적으로 아버지에게 떨어져 있었지만 심리적인 아버지의 그늘 밑에 머물러 있었다.
이미 난 아버지와 너무 닮아 있었고 아직 '내 그림자를 인식조차 하지 못했다.'
아버지와 '다른 것'이 내 정체성을 찾는 것이라 오인했기에 아버지가 원했던 내 모습과 정 반대로 행동하는 '반전 현상'은 여전했다. 선배나 교수같이 권위 있는 대상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며 그들에게 '피학적 공격'을 했던 것도 여전했다. 그 강도만 강해졌을 뿐이다.
그렇게 내 20대는 나와 함께 하는 대상만 달라지고 상황만 달라졌을 뿐 '계속 같은 패턴이 반복'되었다.
내 마음의 치유는 '그림자를 살려내면서' 시작되었다
사실 의도한 삶은 아니었지만 혼자 시골에 살게 되고 작은 분교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게 되었다.
나를 돋보이게 가꾸고 친구들을 만나 트렌디한 곳을 다니는 대신 조용히 산책하고 흙을 만지고 책을 읽었고, 내 의견을 주장하는 대신 아이들을 이야기를 들어주게 되었다.
에너지의 방향은 내 안을 향하게 되었고 그토록 무시하고 외면했던 '내향적인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억압했던 내향적인 기질은 빛을 발해 직업과도 연결되었다. 미술심리치료사는 직업은 말하기보단 들어야 한다. 설득하기보단 공감해야 한다. 그림 그 자체보다 상징적인 의미를 탐색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내가 그림자라 여겼던 것을 살려 내자 잠재력으로 발휘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내 자아를 찾는다는 명목의 어설픈 반전 현상을 가지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내 자질을 두드러지게 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것 역시 나의 일부기 때문에 미술심리치료사로서 다양한 대외활동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아직도 자아가 약해져 있을 때 그림자는 또다시 '음습'한 형태로 내게 드리워지지만 '의식화' 함으로써 그것에 무방비하게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다.
나를 완성해 가고 치유해 가는 것은 인생 전반의 과제인 것 같다
내가 만일 내 그림자를 계속 외면했더라면 내 아이가 혹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쭈뼛거리거나 공개 수업 시간에 '튀지' 않았을 때 속이 상해 다그치거나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훈련시켰을지도 모른다.
칼-융은 그림자 역시 인격 전체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외면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했다. 또 계속 외면당한 그림자는 점점 강해지고 '세습' 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외면하고 부정했던 그림자는 어쩌면 빛나는 잠재력일 수 있다.
내 아이에게 내가 살아내지 못한 '이면의 삶'을 물려줄 것이 아니라 그 삶을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