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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봄 May 19. 2023

그림 읽기 #1 - 신화소로 빚어낸 박정혁의 영토

<Park’s Land> 연작_ @아팅갤러리


그림 읽기 #01


밀란 쿤데라는 『배신당한 유언들』에서 라블레의 책『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을 들어 근본적으로 소설은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땅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소설의 도덕이 된다고 덧붙였다. 즉각적으로 끊임없이 판단을 하려 드는, 이해하기에 앞서 대뜸 판단해 버리려고 하는 뿌리 뽑을 수 없는 인간 행위에 대립하는 도덕이라고 말이다. 이어 밀란 쿤데라는 도덕적 판단을 중지하고, 상상적 장을 창조하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위업인지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 (밀란 쿤데라. 『배신당한 유언들』 14~15p. 민음사.)

 

소설은 고유의 도덕과 법칙들을 토대로 하는 자율적 존재로 구상된 것들로 완성되는 세계(위의 책 15p)이며 선재先在하는 진리와는 또 다르게 새로운 개인, 새로운 자유가 존재하는 영토이다. 이토록 한없이 가능한 세계, 얼마나 매력적인가 말이다.


밀란 쿤데라가 도덕이 중지된 영토가 소설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여기 도덕적 판단이 중지된 또 다른 영토가 있다. 바로 박정혁의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들이다. 홍제동 ‘아팅’에서 전시 중인 작품들은 <에로 그로•난센스가 비선형으로 결합할 때>라는 제목을 붙이고 미술품 애호가들의 시선을 붙들고 있다.

별도의 개별적인 제목 없이, Park’s Land로 번호가 붙은 작품들은 하나의 명확한 물체로 구분되지도, 가름하기도 어렵지만 그 자체로 남다른 고유의 도덕과 법칙들이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신화소로 재편되는 가능성

‘그 어떤 것도 정의하지 말라. 그 순간을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Park’s Land 연작을 두고 섣불리 ‘이것이다’,라고 정의 내릴 수 없을 것이다. 한 번 만들어진 내러티브는 또 다른 시간, 상황 속에서 전혀 다른 내러티브로 도약할 것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도약과 비상은 신화소 Mytheme의 확장으로 완성된다. 신화소는 구조주의적 용어로 자연물의 정보량을 압축해 놓은 근본적인 단위를 말하는데, 신화가 구성되기 위해 필요한 인물, 사건, 배경 등에 활용된다. Park’s Land 연작에는 이러한 신화소를 찾아 ‘읽는’ 그림으로 화폭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신화소를 활용해서 소설의 내러티브를 확장시키는 걸로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물이나 지하 동굴 같은 신화소를 지렛대 삼아 서사를 진행시킨다. 익숙한 것들 가운데 이질적인 것들을 채워 어느 순간 완전히 낯설고 복잡한 지점에 독자를 위치시킨다. 이른바 독자와의 ‘밀당’을 시작하는 것이다. 독자들은 체커판 위에 이미 올라온 기물들처럼 꼼짝없이 작가에게 붙들려 익숙하면서도 낯선 서사를 경험을 하게 된다. 하루키가 신화소의 상호작용을 통해 직조해 놓은 지점들을 수수께끼 풀 듯 통과할 때마다 서사의 쾌락을 만끽하면서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신화소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세계와 영토 그리고 인물들처럼 박정혁의 세계 속에서 신화소로 출발해 만들어지는 수많은 내러티브들이 존재한다. 그 세계와 영토가 존재한다. 과잉되고, 초과되고, 어느 순간 저 멀리 비약해버리고 마는 세계 속에서 화폭을 마주한 관람자들은 수많은 내러티브를 상상하고, 만들어낼 것이다. 차고 넘치고, 또 초과된 채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서사의 쾌락을 느끼면서 말이다.


전시장 입구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작품, Park’s Land27의 베일을 덮은 두상(피에타의 성모의 베일)과 잔뜩 성이 난 듯 주름진 늑대의 콧잔등과 같은 한 데 엉킨 낯선 도상들은 이질적인 채로 또 다른 익숙한 내러티브를 이끌어낸다. 그래서 늑대나 성모, 불길이나 흘러내림, 베일 속에 가려진, 등의 신화소들은 편린처럼, 혹은 난데없는 출현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각각으로 일정한 사전구속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차이화 되며 새로운 상상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이 묘한 지점 때문에 한 걸음 앞에서, 혹은 몇 걸음 더 떨어져서 연신 새롭게 보기를 시도해야 한다. 볼 때마다 달라지는 이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상은 관람자가 화폭을 마주하는 순간 각각의 도상이 응축하고 있는 신화소로서의 역할이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가동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 때문에 Park’s Land 연작에 주목하게 된다.


확실한 정의를 끊임없이 지연하는, 박정혁의 영토 안에는 그래서 더 많은 내러티브가 존재한다. 한순간 붉은 화염 속에서 시간을 빼앗기다가도, 늑대의 기울어진 주둥이 속에서 빨간 망토를 발견한다. 넋을 잃은 성모의 서글픈 눈동자를 떠올리다가, 헤라클레스의 12가지 고행을 되짚기도 한다. 하지만 보이는 도상만으로 상상의 영토가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질적인 구성과 뿜어내듯 포효하는 색감, 그리고 신화소의 상호작용을 통해 가능성이 쉼 없이 가동되는 자유로운 영토는 완성된다.


덧붙여, 개개의 도상들은 독립된 서사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도상들의 결합을 통해서 그 이상의 초과된 어떤 것으로 비상하기도 한다. 각각의 도상이 언어적 상징으로 연계되는 순간, 통상적인 언어의 쓰임새를 넘어 새로운 콘텍스트를 가진 메타언어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층위의 콘텍스트로 읽히는 신화소들은 어떠한 맥락 안에서 범주화되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내러티브를 가지게 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관람자는 순간순간 익숙하면서도 이질적인, 순서나 뒤바뀐 새로운 도전 앞에 서게 된다.

또한, Park’s Land 연작에는 다양한 신체 기관들이 날것의 이미지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무언가를 말할 것 같지만, 말하지 않는 입과 뜨고는 있으나 명확하게 어떤 대상을 바라보지 않는 눈, 그리고 아무것도 지시하지 않는 손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관람자는 화폭 너머의 표현되지 못한 언어들, 볼 수 없게 된 순간들, 손에 닿지 않는 어떤 것들을 연상하게 되고 이는 또 다른 말과, 순간, 그리고 대상들을 이끌어낸다. 생래적인 신체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유보함으로써 강화될 수 있는 또 다른 감각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림을 읽는 것만으로 충분히, 수많은 서사를 체험한 것과 같은 흥건함. 이런 감각에 취한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포르노그라피라는 생각을 가끔 한다. 과잉의 경계를 매번 한도 초과하는 것, 그것으로 새로운 지평을 열어왔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도약이자 비상이 되었으니까. 박정혁의 새로운 영토를 통해 관람자들도, 나처럼 화폭을 읽고자 하는 독자들도, ‘어디로부터도, 누군가에서도 멀어진, 완벽하게 자유로운 상상’을 펼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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