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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식은 연애4

조지 워싱턴

<식은 연애> 서른네 번째 이야기

by 옥광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그의 어린 시절 일화가 꽤 유명하다지.


때는 조지 워싱턴이 여섯 살 꼬마이던 1700년대, 벌목으로 한창 돈을 벌어들이던 조지 워싱턴의 아버지는 그에게 작은 도끼 한 자루를 선물한다. 아버지는 여섯 살 아들의 손에 도끼를 쥐어주면서 과일나무가 자라는 데 방해가 되는 잡목만 베어내라고 신신당부했고 작고 반짝이는 도끼가 썩 마음에 들었던 아들은 고마운 아버지에 대한 보답으로 잡목을 열심히 베어냈다. 하나, 둘, 날이 바짝 선 도끼로 잡목을 정리해 나가는 것은 마치 눈앞에 적을 차례차례 없애는 것 같은 희열을 주었다. 그러나 너무 과하게 열중한 탓일까 그만 큰 실수를 하고 만다. 이제 막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맺은 건강한 벚나무까지 베어버린 것이다. 심는데 큰돈이 들어가 아버지가 특별히 아낀다고 했던 그 나무였다. 이 사실을 모르는 아버지는 그저 아들 조지가 베어낸 제법 높게 쌓인 나무더미를 보며 칭찬과 감탄만을 보낼 뿐이었다. "반나절동안 이렇게 많이 잘라 내다니. 정말 대단하구나." 그의 목소리에 아들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묻어날수록 조지의 얼굴은 붉게 타들어갔다. '나는... 나는 저 칭찬을 들을 자격이 없어.' 조지는 가까스로 용기를 내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아빠를 불렀다. "아빠. 아빠 죄송해요. 제가 잘못해서 아빠가 좋아하는 벚나무까지 베었어요. 그리고 그것을 다른 나무더미에 감췄어요. 제가 아빠를 속였어요." 말을 하는 내내 고개를 들지 못했던 조지는 말을 끝내고 나서는 더 고개를 숙였다. 곧 화를 낼 아빠의 얼굴을 생각하니 무서워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 조지 넌 정말 착한 아이구나." 조지는 깜짝 놀랐다. 예상과는 달리 불호령은커녕 방금 전 칭찬보다 훨씬 더 다정한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조지, 아빠는 거짓을 말하지 않고 진실을 고백하는 너의 정직한 모습에 몹시 기쁘구나. 네가 실수로 천 그루의 벚나무를 버려 놨다 하더라도 거짓말만 하지 않는다면 아빠는 그걸로 만족한단다. 조지 넌 훌륭한 아이야."


그래서 조지 워싱턴은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속 깊이 새기고 평생을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했다고 하는데... 나는 정말이지 저 이야기가 너무 싫다.


"다흔아 진짜야. 나는 너한테 언제나 정직해. 알지? 나 거짓말 못 하는 거."


조윤수 저 조지 워싱턴 같은 새끼. 또 정직으로 용서를 딜하고 있다. 저 새끼는 조지 워싱턴 이야기를 듣고 읽었을 뿐만 아니라 몸소 겪어봤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여섯 살보다 더 나이 먹은 십 대 초반 즈음 엄마 지갑에 손을 대 봤을 거다. 이유야 뭐 수만 가지였겠지. 캐릭터 카드 때문일 수도 있고 피방에 가고 싶어서였을 수도 있고. 그러고선 그날 밤에 멀리 가지도 못 하고 지갑에 현금이 비어 아리송해하는 엄마 주변을 기름 훔쳐 먹은 개 눈 마냥 희번덕거리며 서성였겠지. 엄마의 아리송은 예상보다 길어졌을 테고. 그는 결국 제 발 저림을 못 견딘 도둑이 되어 이실직고했었을 게다. "엄마, 사실은 제가... 정말 실수였어요. 어쩌다 보니..." 비로소 돈의 행방을 알게 된 엄마는 어떻게 했을까? 아들의 범법 행위를 호되게 꾸짖었을까? 아닐걸. 그녀의 눈에는 부끄러움에 우물쭈물 말하는 자신의 소중한 아들한테서 자그마치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보았을 거다. 그 편이 일개 좀도둑으로 모는 것보다 훨씬 나았겠지. 그리고 주변에 이렇게 떠들었을 거다. "돈 몇 푼이 무어가 중요해요? 대신 우리 윤수는 이렇게나 용기 있고 정직한 아이인 걸요." 물론 이건 전적으로 내 맘대로 가늠해 본 나의 뇌피셜이다. 애초에 나는 조윤수의 어린 시절도 모르고 따라서 그의 어머니를 뵌 적도 없다. 나는 그를 법적으로 미성년자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대학생이 되었을 때 만났다. 그는 성실하게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친절한 선배였다. 알고 지낸 지는 한 2년 됐나? 그중에 사귄 기간이 1년이 좀 안 됐고.


나는 조윤수의 잘 생기고 키도 크고 주변 여자들로부터 인기 있는 모습이 좋았다. 그리고 끝까지 거짓을 고집하지 못하는 그의 순수한 모습이 좋았다. 그러니까 드디어 우리가 제대로 사귀기로 한 날, 내가 집에서 독립해 지금 살고 있는 화곡동 작은 빌라에 그를 처음 초대했던 그날 밤,


"사실은 우리 집 잠실이야. 올림픽 공원 근처 방이동"

"진짜? 오빠네 목동 아니었어? 잠실이면... 여기랑 완전 반대잖아."

"응, 그게 왜냐면 말이지..."


하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가 자기 입으로 목동에 산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과제 뒤풀이를 했던 어느 늦은 밤, 그가 내가 잡은 택시에 함께 타길래 막연히 먼저 같은 방향이라고 넘겨짚었을 뿐.


"그러면 오빠는 지금까지 잠실에서 매번 나를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고 했단 말이야?"

"응."


그는 대답하며 해맑게 웃었다. 여태 잠실에서 강서구 화곡동을 바로 옆 목동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 어찌나 미안하던지. 우리 집까지 나를 데려다주고 나면 지하철 막차는 거의 끊길 시간이었는데. 택시비만 해도 2, 3만 원은 족히 넘었을 거리인데. 밤이면 할증도 붙었을 텐데.


"에이, 그럴 땐 창수네 집으로 갔지."

"창수 오빠네? 아, 그래서 그렇게 창수 오빠랑 옷이 겹쳤던 거야?"

"음, 아마도?"


자백이 드라마틱해지려면 반드시 미심쩍은 의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연대 앞 창천동에 혼자 사는 창수 오빠는 그와 같은 학번 동기이자 친구다. 그는 요 며칠 여러 번 창수 오빠가 입었던 옷을 입고 학교에 나타났고 가끔 창수 오빠에게서 나는 냄새도 풍겼다. 하여 두 사람의 친분이 지나치게 두터운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었는데 그게 사실은 나 때문이었다니. 그가 나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내가 더 보고 싶어서 할 수 있는 만큼 내 곁에 머물고 싶어서 가까운 친구네 집에 어쩔 수 없이 들른 것뿐이었다니. 창수 오빠가 나더러 윤수 좀 책임지라고 말했던 게 빈 말이 아니었다니.


"윤수 오빠 진짜 안 힘들었어?"

"힘들었지. 잠깐이지만 우리 집 어딘지 거짓말하느라... 나 진짜 거짓말 같은 거 못한단 말이야. 그래도 덕분에 다흔이 너랑 이렇게 사귀게 됐으니 후회는 없다. 우리는 오늘부터 1일."


나 때문에 일부러 고생을 자처했다고 하는 그가 마냥 귀여웠다. 학교에서 나와 그가 오늘부터 1일이라고 여기저기 외치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그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오밤중에 내 카드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해 왔을 때도 괜찮았다.


"다흔아 진짜 미안해. 오빠가 네 카드로 18만 원을 긁었어. 그런데 진짜 어쩔 수 없었거든."


새벽, 한참 자고 있는데 그로부터 온 전화가 나를 깨웠다. 오랜만에 군대후임을 만나 술을 마실 거라고 했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보다 하고 정말 잘 자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여러 차례 전화가 온 것이다. 3번? 4번 만에 받았던가.


"아..."


너무 잠결이라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그는 얼마 전 한 장 있는 신용카드가 정지되었다고 했다. 대충 둘러댈 수도 있었겠지만 솔직하게 자신의 과오를 털어놨다. "카메라를 사느라... 거기에 이것저것 장비를 구입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누가 봐도 눈이 휘둥그레질 고가의 촬영 장비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게다가 아차 싶었던 과소비 후에 잘하고 있던 카페 아르바이트까지 잘렸단다. "손님이 너무 진상이었어. 그래도 참아야 했는데... 자꾸 샷추가를 공짜로 해달라고 하면서 뜨거운 물을 따로 달라고 하는 거야. 그래서 한 잔을 더 구매하시던가 아니면 이만 나가 주셔야 한다고 했거든. 이건 형평성 문제니까. 그런데 사장이 나를 자르더라."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가 크게 잘못한 건 없어 보였다. 그 카페 나도 여러 번 가 봐서 아는데 거기 사장 좀 또라이였다. 손님은 왕이고 알바는 노비쯤으로 여기는 어느 관아의 탐관오리 같은 인간. 아무튼 여차저차한 악재로 그 달 카드값을 못 내 신용카드가 정지된 그가 대중교통 이용이 불편해져 편의점에서 급한 데로 교통카드 한 장을 사려고 하길래 내가 말렸다. 먼저 나서서 괜히 헛 돈 쓰지 말라고 했고 내 카드를 빌려주었다. 참고로 중어중문과인 나는 과외와 번역 알바로 수입이 꽤 짭짤했으니까.


"이거, 나 내일 아르바이트 면접 가거든. 그거 월급 받으면 네 돈부터 갚을게. 아니 이건 후임들한테 엔빵 해서 내일 바로 채워 넣을게. 아, 이건 장담할 수가 없다. 미안. 정말 어쩔 수 없었다는 것만 이해해 줘."

"아... 응. 천천히 줘. 나는 괜찮으니까."

"그런데 다흔아 혹시 문자도 봤어?"

"문자... 왜?"

"문자에 뭐라고 찍혔는지 모르겠는데. 여기가 실은 벽돌포차거든."


벽돌? 벽돌은 헌팅포차다. 노골적으로 유혹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어느 아프리카 부족의 짝짓기 축제와 흡사한 분탕질이 매일밤 벌어지는 곳.


"다흔아, 다흔아. 네가 괜히 쓸데 없는 오해를 할까 봐 미리 말하는 거야. 여기는 후임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온 거야. 그게 다야. 알지? 오빠 거짓말 안 하는 거? 술값도 녀석들이 하도 취해서 어쩔 수 없이 그나마 멀쩡한 내가 계산한 것뿐이고. 진짜 나 빼고 다 취했거든. 진짜 이게 팩트. 다른 테이블이랑 합석하긴 했는데 나는 하나도 안 취했어."

"음..."


그제야 핸드폰 너머로 윤수 오빠를 찾는 여자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다흔아, 진짜 아무 일도 없었고 또 진짜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나는 문자를 확인하고 그가 처음 전화하기 시작한 시간도 확인했다. 두 시간을 비교해 보니 그가 거의 카드를 사용하자마자 연락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 알았어. 오빠는 집에 언제 들어가? 또 어디 갈 거야, 이 시간에?"

"찜질방 가려고. 거기서 애들이랑 눈 좀 붙였다가 첫 차 움직이면 보내야지. 왜? 이 녀석들만 보내고 나는 너네 집으로 갈까? 보고 싶어?"

"아쭈, 그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어디 올 수 있으면 와 보던가."

"에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애들을 중간에 버리고 나만 그럴 수는 없지. 너무 보고 싶은 다흔아 우리는 내일 학교에서 보자."

"그래 오빠. 내일 아니 좀 있다가 해 뜨면 봐."


흠, 헌팅 포차에서 18만 원. 기분이 좀 그렇다. 액수를 보면 다른 인원까지 합석해서 마셨다는 소리가 된다. 그걸 본인 입으로 솔직하게 말해주니 뭐라고 하기도 애매하고. 절대 아무렇지도 않지 않은데,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좀 그렇다고 말하는 것도 참 어렵고. 이 기분을 어느 타이밍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갈피를 잡는 것도 힘든, 무언가 요상한 기분. 그는, 윤수 오빠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무언가 미심쩍은 싹이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할 때 혹은 올라오기도 전에 싹둑 고백을 해 온다. 잘라내는 건 잘하는데 뿌리째 뽑지는 못 하는 사람. 정말 잘 자고 있었는데 그만 잠이 확 깨버렸다.


"무슨 일이야, 다흔아? 윤수한테 뭔 일이라도 생겼어?"


옆에서 자고 있던 창수 오빠가 잠에서 깼다. 그러니까 공식적인 나의 남자 친구 조윤수의 같은 년도 입학 동기이자 교내에선 그의 가장 가까운 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고창수 오빠 말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윤수 오빠는 후임들이랑 포차에서 놀고 지금은 찜질방 갈 거래."

"포차에 갔다고? 뭐야, 조윤수 재밌게 놀았네. 그래서 너는? 남자친구가 헌팅포차 갔다니까 삐진 거고?"

"삐지긴 뭘 삐져. 안 삐졌어."

"그래? 그러면 우리 잠 깬 김에 한 번 더 할까?"


창수가 다흔이 걸치고 있는 자신의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었다.


"안 돼."

"왜?"

"나 아까 하고 나서 생리 터졌어. 그래서 안 돼."

"이런, 이 절묘한 타이밍 좀 보소."


갑작스러운 생리 이슈에도 창수 오빠의 얼굴엔 별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았다. 그러니 잠깐 기대했던 섹스를 못 하게 된 약간의 아쉬움이 그대로 보였다. 그렇다고 절대 억지로 보채지 않는다. 이러니 이 사람이 참 편했다. 윤수 오빠와 1일이 되기 전부터 딱 이렇게만 만나 왔던 창수 오빠는 무얼 어떻게 하고 놀던 대외적으로는 비밀로 붙이기를 원했고 나도 적극 동의했다. 이 편이 부담이 없어 좋았다. 그러므로 이따금씩 윤수 오빠와는 못 만나고 창수 오빠와는 시간이 맞을 때면 딱 이만큼만 놀았다. 아직 우리 두 사람에 관해 알고 있는 제3자들은 한 명도 없지만 만일 누군가 알게 된다면 '섹스 파트너'라고 부르던 '엔조이 관계'라고 부르던 어떻게든 어떤 단어로 규정지어 부르려 들겠지. 어찌 됐든 당사자인 나는 누가 불러줄 단어 따위 관심이 없었다. 그 고민은 전적으로 제3자들의 몫이었고 나는 아쉬운 것만 보충하면 그만이었다. 보충을 위해 놀 때는 내 집에서 안 놀고 창수 오빠네서 놀았는데 그때도 창수 오빠 집이었다. 윤수 오빠에겐 화곡동 내 집이라고 말했었지만.


"다흔아 일어나. 학교 가자."


아침. 사실 창수 오빠가 깨우기도 전에 먼저 일어나 있었다. 지난밤 시작한 생리에 생리통이 알싸하게 올라왔기 때문이다.


"다흔아 얼른 일어나서 밥 먹고 약 먹어."


이 오빠네 집 화장실 수건 선반 한편에는 언제나 생리대가 있다. 그리고 약상자 안에는 생리통에 잘 듣는 진통제도 있다. 생리대는 볼 때마다 브랜드가 바뀌었는데 약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언제나 한 브랜드다.


"오빠, 이 약 정말 잘 듣는 것 같아."

"그래? 다들 그렇게 말하더라. 이거 먹으면 생리통이 싹 가신다고 하더라고. 나도 나중에 먹어 봐야지."


윤수 오빠는 점심이 되어야 만날 수 있었다. 내심 찜질방은 무슨 돈으로 갔을지 걱정했는데 다행히 다른 후임이 다른 친구에게 빌려서 계산했다고. 다만 그 친구가 포차에서 만난 여자들 중 한 명이었다는 게... 찜질방에는 남자들끼리만 우르르 간 게 아니었다. 헌팅포차에서 만난 여자들도 같이 갔었다는... 정확하게는 연상 누님들이란다. 그녀들은 오랜만에 동생들이랑 학생처럼 놀아서 너무 재밌었다고. 윤수 오빠는 무슨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처럼 말했다. '모든 과오를 털어놓을 테니 나의 죄를 사하여 주시오.' 이쯤에서 내 표정 관리가 진짜 안 됐다.


"다흔아 너 생리할 때 됐지? 벌써 시작한 거야? 생리통 때문인가? 너 갑자기 낯빛이 안 좋아졌어."

"응. 생리 맞는데 생리통은 괜찮은 것 같아. 많이 안 아프네."


그는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용케 내 생리 주기를 기억해 내서는 생리통 걱정까지 해주었다. 괜찮다고 아프지 않다고 말하면서 따로 진통제를 먹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창수오빠네 집에서 먹었던 약빨 잘 들었던 진통제는 추천했다. 저녁, 어느 약국에서 그 진통제를 샀다는 카드 내역 문자가 날아왔다. 당장 현금이 없어 어쩔 수 없었다는 말과 두통이 너무 심해서 이해해 달라는 말과 함께.


호탕하게 빌려줬던 카드는 한 달이 더 지나고서도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후로도 윤수 오빠는 여러 차례 내 카드를 사용했다. 그때마다 사용 내역을 알리는 문자와 동시에, 혹은 더 빠르게 전화가 왔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을 꼭 첨부했고 사용하는 데 있어 일절 거짓이 없음을 증명해 냈으며 반드시 갚을 거라는 강한 의지를 보였다. 전부 편의점이나 PC방에서 사용한, 포차에서의 18만 원에 비하면 극히 미비한 액수였기에 크게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따금 카드 사용 내역 문자와 자신이 말하는 행적이 얼마나 일치하는지 하나하나 비교해 가며 자신의 정직함을 뿌듯해할 때만이라도 작게나마 뭐라고 하고 싶었지만 이 또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18만 원이라는 태산에 티끌 같은 돈을 얹으니 어쩔 때는 18만 원도 티끌이 아닐까 아리송해졌다. 그냥 티끌만 쌓인 것보다 태산 위에 쌓인 티끌이 더 작아 보였다. 그냥 그렇게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랬던 조윤수가, 무슨 일이 생기면 아니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바로바로 연락을 해 왔던, 매우 그랬던 조윤수가 어젯밤 잠수를 탔다. 7시경 가볍게 한 잔 찌끄린다고 영통이 한 번 왔었는데 그 자리에는 창수 오빠도 있었고 다른 선배 오빠 언니들도 있었다. 그러고선 감감무소식. 나는 조바심이 났다. 내쪽에서 하는 통화 연결음은 계속 부재중으로 넘어갔고 톡은 아침이 될 때까지 읽씹이었다. 혹시나 해서 보낸 여러 통의 일반 문자에도 답 없기는 마찬가지. 결정적으로 밤새 내 카드 사용 내역 문자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이게 어색했다. 요 근래에는 택시사용 문자로 종종 그의 무사귀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창수 오빠로부터는 피곤해서 새벽 어느 때즈음 술자리에서 혼자 도망 나왔다는 톡만 받을 수 있었으니 그도 윤수 오빠의 행방을 모르기는 마찬가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에 되레 걱정이 됐다. 말하기 애매하다는 이유로 마음속 깊이 숨겨둔 그를 향한 불만을 혹시라도 알아챈 게 아닐까. 불만의 모습은 잘 숨겼을지 모르나 불만의 냄새까지는 제대로 못 숨긴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하룻밤이 지났다. 윤수 오빠는 다음 날 오후가 돼서야 만날 수 있었다. 버스와 지하철이 다니는 평일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택시를 이용한 카드 내역 문자가 날아왔다. 동시에 그로부터 지금 막 학교에 도착했다고 어디에 있냐는 전화가 왔다. 그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에게 지난밤 일어났던 일들을 콸콸콸 쏟아냈다. 굳이, 굳이 말이다.


"그러니까 아침 아니 점심에 눈 떠보니까 그 언니네 집이었다고? 그것도 침, 침대에서?"

"응. 분명히 규민이, 창수, 종석이 다 같이 있었는데 아침에 정신 차려 보니까 그게..."

"그게 뭐?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다른 언니 오빠들은 언제 갔는지 안 보이고, 오빠만 그 언니하고 단 둘이 있었다는... 그 말이잖아, 지금? 뭐 달라져?"

"다흔아. 오빠가 거짓말 못 하는 거 알지? 나는 너랑 나 사이에 괜한 오해 만들고 싶지 않아. 이건 진심이야."

"오해? 무슨 오해?"

"실수라고. 전부 실수였어, 다흔아."

"실수? 무슨 실수?"

"솔직히 일어나면 안 좋았을, 아니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됐을 부적절한 일이 일어나긴 했는데... 이건 절대 내 의지에 의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너는 나를 용서해 줘야 돼. 만일 이 부적절한 일에 내 의지가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다면 나는 어떻게든 너에게 숨기려고만 들었겠지. 하지만 아니야. 난 언제나처럼 너와 나 사이에 비밀 같은 건 만들고 싶지 않고 그냥 정신 차려보니까 그렇게 된 것뿐이고. 진짜 일부러 그러려고 그랬던 게 아니야."


만약 나라면... 나 같으면... 저렇게 말 못 한다. 나 같으면 나와 창수 오빠 관계 같은 거 절대 말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오빠는 어떻게 이러지. 처음이라면서, 실수라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시시콜콜 전부 말할 수 있는 거지. 이렇게 용기 내어 당당하게 자신의 과오를 말하다니. 지난밤 같이 있었다는 언니, 나는 잘 모르는 언니다. 같은 과지만 제대로 어울려 본 적이 없다. 그러니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쫓아가서 얼굴은 알지만 그래도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이러쿵저러쿵 따져봐야 하나. 저 인간 때문에 이제까지 잘 알지도 못했던 그 언니가 갑자기 내적으로 가깝게 느껴진다. 물론 안 좋은 관계로 가깝게.


"다흔아 요새 내가 술을 너무 마셔서 그래. 진짜 실수야. 나 오늘부터 술 안 마셔. 맹세해. 그러니까 용서해 줘. 한 번만 용서해 줘."

"용서? 무슨 용서?"

"내가 걔한테 정말 발톱의 때만큼이라도 마음이 있었으면 이렇게 너한테 털어놓지도 못해. 나는 하늘을 우러러 내 마음만큼은 떳떳하니까 너한테 이렇게 고백하는 거야. 그리고 걔 진짜 내 타입 아니야. 실수, 실수 한 번쯤은 용서해 줄 수 있잖아."


하, 저 태도. 저 태도가 문제구나. 자신의 과오를 자기 입으로 먼저 밝히면 마땅히 이해받고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는 저 믿음과 그 믿음에서 오는 신념 어린 태도. 과오의 내용보다 저 태도가 더 재수 없다. 물론 내용도 재수 없지만 저 태도가 더더더 재수 없구나! 조지 워싱턴을 잘못 배운 새끼!


"오빠... 우리 생각을 좀 하자. 솔직히 말을 못 하고 있었는데 요새 내가 마음이 좀 그래. 그래서 말인데 내 생각엔 우리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그게 무슨 소리야? 나 이제부터 술 안 마실 거라니까 술만 안 마시면 이런 일 따위 절대 일어나지 않아."

"아니야, 오빠 때문이 아니고 나 때문이야. 내가... 내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

"다흔아, 평소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다흔이 너 쿨한 애잖아."


나? 쿨하지. 잘 안다. 조윤수 저 인간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자랑할 때 으뜸으로 꼽는 것이 내 성격이었고 그 성격 중에서 또 제일인 것이 내 쿨함인 것을. 그래서 이미 쿨했던 나는 더 쿨하려고 노력했으니... 내가 그렇게 시원시원했던 사람인데 조윤수 네가 결국 이렇게까지 뜨겁게 만드는구나. 그러니 제발 식힐 시간이 필요하다. 안 그러면 내 속이 탄다.


"당분간이야. 그러니까 오빠 나한테 시간을 좀 줘."

"제발 안돼."


조윤수는 애처로웠다. 눈에 눈물까지 글썽였으니.


"... 오빠 그러니까 내 카드도 이제 돌려줄래?"

"다흔아. 아직 내가 쓴 카드 값도 다 못 갚았는데 어떻게 그래? 그건 내가 카드 값이랑 같이 돌려주기로 했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카드도 그만 돌려줘. 오빠 아르바이트도 구했잖아. 그걸로 오빠 카드나 살려 봐."

"다흔아 내가 목표한 금액을 아직 못 모았어. 그래서 그래. 그 금액만 모으면 돌려줄 거야. 진심이야."


그동안 빌려줬던 카드를 돌려받지 못했던 이유. 조윤수는 자기가 쓴 만큼 현금과 함께 이자까지 얹어 주고 싶다며 카드 반납을 차일피일 미뤘었다. 그걸 지금 이 순간에도 이유로 삼다니.


"됐고. 카드 줘."


조윤수는 꿈쩍도 안 했다. 자신의 지갑으로 손가락 하나 옮기질 않는다. 정말 너무 바른 자세로 당당하게 앉아 있기만 했다. 누가 보면 내가 강제로 카드를 내놓으라고 하는 사람처럼 보일만큼. 내가 직접 저 인간 안쪽 호주머니에 들어 있을 지갑을 빼앗아야 할까. 잠시 그 모습을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몹시 흉했다.


"알았어. 그러면 나 먼저 일어선다."


일어서는데 적잖이 긴장이 되는 것이 덩치가 큰 조윤수가 일어서 돌아서는 나를 붙잡는 모습을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이 또한 흉했는데 다행히 조윤수는 잡지 않았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하필이면 지난밤 조윤수와 잤다던 그 언니를 마주쳤다. 언니는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내 눈을 피하기는커녕 심지어 옅은 미소를 곁들인 가벼운 목례까지 했다. 조윤수와 나는 학교에서 제법 소문난 커플이었기에 저 언니도 내 존재를 잘 알 것인데 저리 행동하는 걸 보니 역시 지난밤이 실수였다는 조윤수의 말은 모두 사실일 것이다. 조윤수. 정직한 조윤수. 거짓말할 줄 모르는 조윤수. 자신의 과오에 관해 용기 내어 먼저 자백할 줄 아는 조윤수. 조지 워싱턴 같은 새끼.


내가 조윤수와 사귀고 나서도 창수 오빠를 계속 만난 이유가 있다. 조윤수가 섹스를 좀 못한다. 생긴 건 잘 생겨서 엄청 기대하게 만드는 피지컬인데 막상 해보면 너무 심심하다. 또 지루하다. 이 점만 빼고는 어떻게든 감당해 보려고 노력해 왔는데 저 조지 워싱턴 같은 태도 때문에 더 이상 안 되겠다. 하여 카드사에 전화를 걸어 조윤수 손아귀에 있는 내 카드를 사용 정지 시켰다. 흥, 그깟 플라스틱 쪼가리. 차라리 몇 백이라도 긁었으면 어디 가서 조윤수는 대도라고 시원하게 쌍욕을 때려 박으며 경찰에 신고도 하고 그랬을 텐데 그가 사용한 금액을 계산해 보니 그냥 데이트 비용을 과하게 썼다고 생각하면 될 만큼의 액수였다. 그러니까 그냥 안 받고 말겠다는 소리다.


얼마 후, 조윤수로부터 나를 너무 좋아하기에 나를 위해서 내가 원하는 데로 어쩔 수 없이 헤어져 주겠다는 연락이 왔다. 그가 사용한 카드값을 어떻게 변제해 갈 것인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었고. 주변에는 자신이 어떤 실수를 했는데 나의 프라이버시를 위해 실수의 내용에 관해선 자세히 말해 줄 수 없지만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니 그 실수를 용납해 주지 않는 여자 친구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떠들어댔다. 여기에 틀린 말은 없었다. 그러니 새삼 틀린 말 하나 없는 진실된 말도 참 열받게 하는구나 싶다.


"다흔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너 윤수랑 끝낸 거면 이제 나랑 제대로 만나보는 건 어때?"


어라, 갑자기 들어온 창수 오빠의 고백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 잡았다.


"음, 싫어. 나는 그럴 마음이 없어. 내가 윤수 오빠를 만나면서 오빠를 만난 것처럼 오빠를 만나면서 반대로 윤수 오빠를 만난 이유도 있거든. 이게 어떻게 보면 둘 다 비슷한 이유이긴 한데 이 이유를 생각해 보니 역시 싫어."

"응? 그게 뭔데? 무슨 이유가 있었어?"

"있었어. 전부 다 알려고 들지 말고. 어떤 그런 이유가 있었다는 것만 알아둬. 아무튼 나 앞으로 오빠도 안 만날 거야. 어설프게 모자라느니 아예 안 하는 게 나은 것 같아."

"뭐가 모자라서 뭘 안 할 건데?"

"그런 게 있어. 더 이상 묻지 말아 줘. 나도 힘드니까."


웃기는 오빠다. 창수 오빠는 갑자기 사귀자고 떠보더니 그다음 주에 호주로 워홀을 떠났다.


잘못에 대한 반성보다 잘못에 대한 고백에 사활을 걸어왔던 조지 워싱턴 같은 조윤수 새끼는 이후에 몇 만 원을 보내왔다. 그가 나에게 빚진 액수에 비하면 참으로 소소한 금액이다. 18만 원의 반도 안 되는 액수였으니까. 그는 그 몇 만 원과 함께 자신이 고한 이별은 생각할 시간을 갖고 싶어 하는 나에게 편한 시간을 제공해 주고자 하는 배려였다고 했다. 그러니 혹시 자신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좋다고. 새삼 그가 하는 고백들이란 게 참 애매하고 아리송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그는 거짓말쟁이가 아니었고 순간순간 진실에 충실한 정직한 사람일 것에는 믿어 의심치 않지만...


막말로 조지 워싱턴이 벚꽃나무를 모르고 실수로 베었는지 아니면 도끼질하는 손맛이 좋아 알고도 일부러 베었는지 알게 뭐람. 아마 조지 워싱턴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를 거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부러진 벚꽃나무만 불쌍하지. 애초에 여섯 살짜리 꼬맹이한테 도끼를 선물해 줬다는 것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










조지 워싱턴. by 옥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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