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속에 녹아내린 벌집을 보는 꿀벌의 기분
얼마 전, 한국의 어딘가에서 이 폭염을 견디지 못한 벌집이 녹아서 꿀이 다 흘러내려버렸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꿀벌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은 전 세계적인 추세이고, 이것은 식물들이 꿀벌에 의해 수정될 기회가 줄어들기 때문에 생태계에도 큰 악영향을 준다는 기사도 읽은 적이 있다. 가뜩이나 꿀벌이 살기 힘든 세상인데 이제 폭염으로 벌집까지 녹아내리다니, 꿀벌에게는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닌가? 꿀벌에게 벌집은 단순한 집 이상의 의미인데, 꿀벌은 벌집을 만들기 위해 밀랍을 생성해내다가 탈진해 죽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리고 평소에도 벌집을 청소하고, 꿀이 잘 숙성되도록 저장고를 돌보고, 너무 덥거나 춥지 않도록 온도 유지에도 애를 쓴다.
이렇게 중요한 벌집이 녹아내려버리다니.. 내가 꿀벌이라면, 온 세상이 나에게 죽으라고 저주를 퍼부으며 악의를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 분명하다. 바로 최근 전에는, 꿀벌들이 천적인 장수말벌에 대항하기 위해 수백마리의 꿀벌들이 장수말벌을 둘러싸고 진동으로 열을 내서 쪄죽이는 식으로 진화했다는 기사를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던 터라, 폭염에 벌집이 녹아버린 재앙을 맞닥뜨린 꿀벌들은 내게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이재민과도 같은 이미지로 선명하게 잔상을 남겨버렸다.
나는 동물을 무척 좋아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동물들은 대부분은 포유류에 해당되며 유일한 예외는 오리 정도다. 요 몇 년 사이에는 멍멍이, 꽥꽥이, 곰곰이 정도가 가장 좋은 것으로 정리가 되었다.
그런 내가 꿀벌에게 느끼는 감정은 좀 묘하다는 생각이 최근에 들었다. 곤충은 좋아해본 적이 없는데다가, 벌이라니, 어렸을때 벌에 쏘여서 놀란 기억만 있을 뿐 그다지 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일이 없었다. 하기는 양봉업자나 원예학과 교수라든가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벌에 관심을 가질 일이 별로 없지 않겠는가. 우습게도 내가 꿀벌에 흥미가 생긴 것은 본격적으로 푸Pooh를 좋아하게 되면서였는데, 꿀을 향한 푸의 무한한 사랑 덕분에, 꿀벌푸 같은 귀여운 모습이 덩달아 좋아졌고 그러다보니 '꿀벌이 꿀을 모으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푸가 꿀을 탐닉하는 것이야 가상의 일이니까 위니더푸 세계의 꿀벌들에게도 아무런 해가 되지 않는다. 푸의 꿀단지는 꿀벌을 착취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꿀이 끝없이 나오는 꿀의 화수분이자 무한한 꿀의 우주이며 꿀랙홀 같은 거니까. 그러나 인간이 먹는 꿀은 다르지 않은가. 꿀벌이 열심히 노동해 온 댓가를 인간이 영악하게 가로채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참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꿀벌도 인생에 스트레스를 느낀다고 한다. 꽃가루를 모으고, 이동할 때 비가 내리거나, 기온이 낮을 때 스트레스를 강하게 느낀다고 한다. 그렇게 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며 노동을 해서 모은 꿀을 도둑질하다니! 이런 생각을 하면 도무지 앞으로 꿀을 먹을 수 있겠다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힘들게 일한 꿀벌 한 마리가 일생에 거쳐 모은 꿀이 티 한 스푼에 불과하다는 이야기에 이르면 이젠 슬픈 마음까지 들어버린다.
꿀벌 한 마리가 평생 모으는 꿀의 양이 티 한 스푼 정도라는 얘기는 떠도는 이야기를 본 것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실제로 얼마나 모으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게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애를 썼는데도 결과물은 한 줌에 불과하다는 이미지는 나의 마음 한 군데를 꿰뚫었다. 왠지 그 꿀벌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 않나? 이렇게 아둥바둥 열심히 스트레스를 받으며 나름 살아내보려고 애를 쓰지만, 내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선이란 결국 어떤 의미에서는 티 한 스푼에 불과한 것이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나도 어렸을 때는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어떤 종류의 재능과도 거리가 먼 인간이란 점만을 확인하고 있다. 나이를 먹는 것은 '소질없음'의 항목이 더 늘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돈을 버는 것이 나는 너무나 굉장하다고 생각한다. 다름 사람이 돈을 지불할 정도로 뛰어난 무엇을 내가 가지고 있는가? 나에게 특히 그런 돈을 만들어낼 수 있는 종류의 재능은 전무하다.
유일하게 남들보다 잘할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노젓기'인데, 다 성장한 이후로 딱 세 번 정도 쓸 일이 있었다. 슬로베니아 블레드에서 한 번, 큐슈 다카치 협곡에서 한 번, 도쿄에서 우에노 공원에서 한 번. 특히 다카치 협곡에서는 나의 압도적인 노젓기 실력에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감탄을 할 정도였다. 그때는 애인 앞에서 으쓱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다. 도대체 노 잘 젓는 것을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는가? 취업에도 구애에도 도무지 쓸 수가 없는 노릇이다.
"안녕하세요. 꿀곰입니다. 저는 노를 잘 젓습니다. 저를 채용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운 아가씨, 저는 노를 굉장히 잘 젓는데요, 저랑 함께 배를 타러 가시지 않겠어요?"
노젓기를 제외한다면 그나마 내가 가진 하찮은 것들 중에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글쓰기일 것이다. 어쨌든 어렸을때 받았던 상들도 전부 글쓰기로 받은 것들이다. 내가 받는 칭찬 중에 내가 쓴 글에 관한 것일때 가장 기분이 좋기도 하다. 전업 작가가 되어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는 꿈은 아주 일찌감치 버렸고, 어쩐 일인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서는 점점 더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언제나 나는 나의 글 때문에 어떤 일들이 생겼다. 제주에 살던 때에는, 그 당시에 내 블로그를 구독하던 어떤 여성이 순전히 내 블로그만 보고 날 만나고 싶다고 제주도까지 찾아온 적도 있었다. 그때의 그 블로그는 이미 취업 후 업데이트가 상당히 되지 않고 있었던 데다가, 거기에 올렸던 글이란 것들은 별 대단치도 않은 것들이었는데도. 신변잡기적인 나의 생각이나 일상이나 어줍잖은 감성을 담아 끄적였던 글들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런데 그 글만 보고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었다. 신기한 일이다.
이후로 서로 관심이 있어서 사귀게 된 다른 여성이 있었는데, 나와 알게 된 후로 내 블로그에 있는 모든 글을 전부 읽었다고 해서 몹시 깜짝 놀랐었다. 나는 내 블로그를 알려준 적도 없는데, 내 소셜미디어 어딘가에 있는 링크를 보고 나머지 글도 전부 다 봤던 모양이다. 마찬가지로 대단할 것도 없는 글들인데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시간을 들여 그 글들을 다 읽게 했던 걸까.
이런 일련의 감상들이, 나로 하여금 다시 글을 써야하겠다는 마음이 들게 했다. 나는 꿀벌에 불과하고, 글쎄, 대체 내가 '꿀'이란걸 모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찮은 나의 시간들을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고 폭염 속의 밀랍처럼 흘러내려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언제고 일상의 잡생각들을 꾸준한 글의 형태로 써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에세이'라고 하기엔 거창해서 선뜻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어떤 타이틀을 시리즈로 정해두지 않으면 그 '선뜻 그러지 못해서 하지 못하는 상태'가 계속 이어질 것이 분명해서 이렇게 이름을 정해보았다. <꿀벌의 기분> 이라고. 장수말벌은 자꾸 생명을 위협하고, 아무리 열심히 모아도 꿀은 자꾸 축나는데 폭염 속에 집까지 녹아내린 꿀벌의 사정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기 때문에 '꿀벌의 사정'이라고 하는 쪽에 조금 더 마음이 갔지만 아무래도 사정이라고 하면 우리는 동음이의어를 떠올리는 타락한 존재들이니까 아무래도 기분이라고 하는 쪽이 더 깔끔하겠지요.
이러한 사정으로, 나는 당분간 꿀을 모아볼 생각입니다. 그게 꿀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될지 어떤 것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꿀곰의 기분>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