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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나 자신을 위로해야 할 때..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골육종을 주로 보시는 선배 의사 선생님께서 내신 책의 제목입니다. 암과는 아무 연관도 없던 10여 년 전, 선배님의 출판 기념회에서 연주를 해 드리고 책도 증정받았습니다. 한번 쓱 읽어 보고 책장에 꽂아 넣었지요.  암 전문의이신 선배님의 암환자와 보호자들과의 친밀한 교감이 느껴지는 책이었지만, 당시 저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선배님의 출판 기념회에서 같이 연주를 했던 재능 있는 젊은 기타리스트가 뇌출혈로 천국으로 먼저 떠나고, 제 남편이 육종암에 걸려 세상을 떠난 것은 물론 우연이겠지요? 사실, 남편의 심장육종을 가장 먼저 진단해 준 것은 선배님이 일하시던 병원이었습니다. 진료과가 다르시지만 일부러 중환자실로 내려오셔서 남편의 병명을 알려주시는 선배의 눈에는 걱정과 연민 그리고 미안함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 눈을 쳐다보며 저는 선배님의 책제목이 생각났습니다. "당신 잘못이 아닙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3 년이 되어갑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노력을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혹시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그를 먼저 떠나보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내 팔자가 세서 그가 먼저 떠났나, 내 기도가 부족했나, 내가 전생에 엄청난 죄를 지었나, 가뜩이나 사람도 만날 수 없던 코로나 시국에 긴긴밤을 쓸데없는 생각으로 채워가며 밤을 지새우곤 했었네요.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도 혹시 집터가 나쁜 건 아닌지, 굿이라도 한번 해야 하는 건지, 별별 생각을 다 했지요. 아무렇지 않다가도 갑자기 서러워지기도 하고 내 팔자가 왜 이런지 한심하기도 하더군요.




이 세상에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하찮아 보이는 삶이라도, 그 삶의 주인은 언제나 자신이 주인공인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진정으로 죽고 싶은 사람도 없을 겁니다. 혹여 극단적인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해도, 그 선택까지의 과정에서는 자신의 삶의 주인공으로서의 고뇌와 갈등이 숨어있고,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에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겠지요.  죽고 싶은 사람도 없고, 죽어도 되는 사람은 없는데, 죽지 않는 사람도 없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내고, 모든 삶의 엔딩이 죽음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서부터, 제 인생은 마치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처럼 재미가 없어졌습니다. 어치피 죽을 건데를 앞에 붙이면, 하고 싶은 일도, 갖고 싶은 것도, 모두가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면, 너무도 치열하게 살고 있는 다른 이들의 삶이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인간에게는 자기가 원하는 시간에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자유마저도 없습니다. 어쩌면 삶의 끝자락을 붙잡고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자식 때문에, 부모님 때문에, 여러 가지 핑계를 찾아가며 영혼 없는 삶을 이어갑니다. 살아있는 것이 아무리 힘이 들어도, 지금 내가 쥐고 있는 것들을 끊어 버리기가 힘든 것이지요.



2남 2녀의 맞딸인 저는, 어릴 적부터 맞이 노릇 늘 잘해야 한다고 세뇌당했습니다. 유독 사고를 많이 치던 제 바로 밑의 우리 집 장손이 5살 때 거의 전신에 화상을 입는 것을 보며 저는 동생이 아플까 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혼이 날까 걱정이 되어 울었습니다.  초등학교 때, 수박 한 조각을 가지고 육탄전을 벌이다가 싱크대에 부딪쳐 동생의 영구치 앞니가 깨졌을 때도, 이후 동생이 야구공을 받다가 안경이 깨져 피가 철철 나도, 동생을 잘 돌보지 않았던 제 책임인 것 같아 미안했습니다. 동생들이 다 떠난 친정집이 들어가면서도 제 역할은 박경리 선생님의 소설 “토지” 의 주인공 서희처럼, 집안을 지키고 이끄는 일인 줄 알았습니다. 허지만 이제 저는 알아버렸습니다. 그 모든 일들이 제 책임과 의무가 아니라는 것을요. 사건 사고는 언제나 일어납니다. 누구의 탓도 잘못도 아닌 그저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뿐이지요.



나쁜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꼭 누군가를 원망하고 미워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살면서 닥칠 나쁜 일들이 그저 우연히 그때 일어난 것뿐이지요. 결혼을 앞둔 딸아이를 보며 마음이 무척 심란합니다. 요즘은 신랑신부가 손을 잡고 같이 들어가기도 한다지만, 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는 상관이 없지만 아빠가 없는 딸이 신랑과 손을 잡고 들어가면 무척 슬플 것 같습니다. 결국은 또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애아빠가 죽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척 힘든 나날들입니다.  오늘 저는, 제 자신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습니다.


그가 떠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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