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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그 해 여름은 뜨거웠다

뜨거웠던 나의 1987

오랜만에 대학로에 다녀왔습니다. 대학로에는 아직도 KFC 치킨이 있더군요. 이화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닌 저에게 대학로는 고향 같은 곳입니다. 우리나라에 프라이드치킨의 위상을 높였던 KFC 치킨이 거의 처음 생긴 곳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 회사의 대표 모델인 할아버지가 반겨주는 KFC 앞은, 스마트폰은 커녕 휴대전화도 없던 그 옛날, 친구들과 만나서 놀러 가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1-20분은 애교, 적어도 30분 정도는 기다리며 친구들을 만나고, 또 친구와 친구를 만나게 돼던 만남의 광장 같은 곳이었지요.


대학로 KFC


1987년, 저는 민주화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정권과 싸우던 저의 동년배들과는 다른 여름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음악을 하는 유학생이었던 저의 1987년 여름은, 첫사랑에 빠져 그 매개한 최루탄의 연기마저 달콤했던 아득한 여름이었습니다.


최루탄에 희생된 이한열 열사는 나의 첫사랑과 동창이다


그는 제 초등학교 동창의 친구였습니다. 그 해 여름 저와 제 초등학교 동창들 두 명은 연세대학교에서 여름학기를 들었습니다. 미국 대학의 교양 과목을 이수하기 힘들었던 저에게는 학점 교류라는 꼼수였지요. 6월에 이한열 열사가 돌아가시고, 7월부터 듣는 여름학기 내내 저희는 최루탄을 피해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지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자 친구들과는 꼭 연대 앞 웬디스에서 만나는데, 남학생들이랑은 다방 같은 데서 모여있곤 했지요. 저는 수업이 끝나고 최루탄을 피해 우르르 함께 친구들과 다방으로 가는데 따라가고는 했습니다. 일단 그곳에 가면, 마법처럼 서로의 친구들이 찾아와 함께 모여 놀곤 했습니다. 논다는 게 끽해야 저녁 먹고 그때는 디스코장이라고 불리던 클럽에 가는 것이었으니까요. 여하간, 저는 제 여자 친구들을 불러내고, 제 남자 동창들은 자신의 남자 친구들을 불러 모아 그저 커다란 그룹이 되어갈 때쯤, 저를 집에 데려다주던 친구가 생겼습니다. 왜 그 친구와 제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게 됐는지는 아직까지도 미스터리지만, 그리 매일 붙어 다니며 그도 저도 모르게 어느새 저희는 연인이 돼 있었습니다. 연인이 된 우리는, 친구들이 많은 신촌보다 대학로를 돌아다니며 데이트를 했습니다. 프라페를 먹고, 비엔나커피를 마시고, 밤새 전화통을 붙들고 있어 아버지한테 불호령이 떨어져도, 뭐가 그리 할 말도 많고 재미났는지, 그 여름을 거의 매일 만났습니다. 저는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유한 만남이라서 그랬을까요? 서로에게 미친 듯이 빠져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던 8월, 저는 최대한 날짜를 미루고 미뤄서 비행기를 잡아 놓았지만, 그래도 가야 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우리는 대학로 KFC 앞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연인에게 보내는 꽃이기에는 너무 크고 장대함


미국 가기 전날까지 돌아다닌다고 잔소리를 한 바가지 얻어먹고, 대학로로 갔더니, 저보다 먼저 온 그 아이가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십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서로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 첫사랑은 이상하게 무언가 불편한 듯 서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무슨 커다란 꽃바구니를 하나 들고 있는 겁니다.

"웬 꽃바구니?" 제 물음에 그는 "너 스무 살 생일에 함께 축하해 줄 수 없잖아."라며 자신이 들고 있던 커다란 꽃바구니를 저에게 넘겨주더군요. 당시 저희들에게는 만 스무 살이 되면, 장미 스무 송이와 향수, 그리고 첫 키스를 선물 받아야지 커플이 이루어진다는 말도 안 되는 전통(?) 이 있었거든요. 9월생인 제가 미국에 돌아가야 하니, 미리 준다나 뭐라 하면서 절대로 맘 바뀌면 안 된다고 큰 바구니에 장미 스무 송이와 다른 꽃들을 엄청 넣어서 커다란 꽃바구니를 해 들고 왔더라고요. 아니, 그럼 스무 송이의 꽃다발을 해야지, 꽃바구니가 뭡니까, 꽃바구니가? 게다가 그 촌스러움은 진짜 딱 "축 발전, 상가번영회장"이라는 리본을 써 꽂아서 울 아버지한테 보내야 할듯한 크기와 모양이었으니. 게다가 얼마나 무겁던지요. 그 꽃바구니를 들고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술 한잔 더 하는데 계속 제가 낑낑대며 들고 다니게 하더군요, 저한테 선물한 거라고. 그걸 낑낑대고 달고 다니면서도, 저는 그 아이의 무엇이 그리 좋았을까요? 한국에서 마지막 날이라고 빌고 빌어서 1 시간 늘린 통금인 11시에서 딱 1 분 늦었는데도, 아버지가 집 앞에 나와서 지키시더라고요. 물론 아버지가 보인 순간 그는 뒤돌아 서서 가고 저는 미국 가기 아쉬워 할머니께 꽃바구니를 사 왔다고 거짓말 치고, 꽃바구니는 할머님 방 앞에 고이 놓고 올라가서 다음날 미국으로 줄행랑을 쳤지요.




그렇게 빠른 스무 살 생일을 축하해 줬는데도, 결국 그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대학로에 가서 KFC 할아버지를 보면 저의 첫사랑이 생각납니다. 그때 그 사랑이 이루어졌다면 행복했을까요? 놀랍게도, 저희는 너무 우연히 너무 가끔 마주칩니다. 정말 꿈과 같이 교회 갔다가 모퉁이를 돌았을 뿐인데, 그가 그의 아들과 서 있고, 선배 언니네 집에 가서 나오는 길에 차를 빼느라 잠깐 서 있는 사이 갑자기 마주치고는 해서 이거 무슨 신의 계시가 아닐까 했지만, 그런 건 아니더군요. 친구가 되기에는 너무 깊이 마음을 나누었었기 때문에 서로의 삶을 살아가지만, 가끔씩 그를 마주치거나 소식이 들리는 게 아마 전생에 엄청난 빚을 서로 주고 받았나 봅니다.

그가 그때 저를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요? 모든 일의 리더인 그의 성격은 아마 민주투사로 앞장서서 투쟁을 하며 이 나라의 민주화에 이바지 하였겠지요. 하지만, 우연히도 그 여름, 그는 시한부 사랑을 했어야 했고, 덕분인지 때문인지 그는 정치 대신 우리나라 공기업에 입사하여 철밥통 생활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87이나 택시드라이버 같은 영화들을 보며 가끔 "이 나라의 유능한 인재 하나를 내가 공무원으로 들어 앉혔군", 하며 친구들과 낄낄대곤 하는데, 그는, 행복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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