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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가 뭐길래

가족보다 먼저일까요?

가을이 점점 더 깊어집니다. 날씨가 추워지고, 이제 곧 눈이 오겠지요. 10월 말까지 해야 하는 많은 숙제들이 있었습니다. 중간고사도 내야 하고, 브런치 글도 써야 하고, 친구들도 만나고, 이런저런 숙제들을 끝내고는 며칠을 앓아누웠었습니다. 워낙 있는 과민성 대장염에 역류성 식도염이지만, 제가 늘 달고 사는 말처럼, 산통보다 더한 복통에 며칠을 구르고 나니, 벌써 주말이네요.


끔찍이도 위했던 이형택 선수

이 즈음, 남편은 언제나 계획을 짜곤 했습니다. 드디어 테니스 시즌이 끝나가는 때기도 하지만, 추운 겨울에 서울에서 훈련을 할 수 없기에, 따뜻한 남쪽나라로 떠나곤 했습니다. 프로 선수들과 여행을 다닐 때면 보통 캘리포니아나 호주에 가서 겨울을 보내곤 했지만, 중국으로 진출한 이후로는 심천이나 홍콩으로 동계훈련을 가곤 했습니다. 12월 10일경에는 떠나야 하는 그의 일정에, 1월에 입시를 치러야 하는 학생들을 가르쳤던 저는 한 번도 따라가지 못 헸습니다. 물론 훈련을 따라가도, 절대로 그 스케줄을 따라다니지도 못하는 저질체력인 저는 함께 갈 생각도 하지 않았지만 말이지요.


테니스의 마이더스의 손라고 했는데..

남편이 2018년도 1월에 서울에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우연의 연속이었습니다. 그 전해, 유학을 떠난 딸이 아빠가 너무 보고프다고 서울까진 못 오고, 캘리포니아에서 만나자고 해서, 추수감사절 방학에 남편이 미국에 다녀왔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자리를 비운 1 주일 새, 남편과 함께 전지훈련을 떠나야 하는 선수가 부상을 당한 것입니다. 보통, 그렇게 남편의 시간이 비면, 여러 가지 제안들이 들어오는 데, 이상하게 그 해는 날짜도. 금액도 그다지 좋은 제안이 없었습니다. 남편과 딸, 셋이서 가족사진을 찍는 게 꿈이었던 저는, 그 해 남편에게 그냥 서울에 있자고 약속했습니다. 겨울 방학에 돌아온 딸아이는 친구들과 놀러 다니느라 가족사진은 엄두도 못 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국으로 간 딸아이는 여기저기 아프다 징징대고, 집에 있는 남편은 숨이 자꾸 막힌다고 징징댔습니다. 두 사람 다 조금만 아파도 자신의 몸 상태를 부풀려 이야기 하기에, 그다지 큰 신경은 쓰지 않았습니다. 셋이 투닥거리던 그 겨울방학이 우리 집 식구의 건강한 마지막 방학이었습니다. 남편의 답답함은 원발성 활액막 심장 육종이라는 희귀병으로 판명됐고, 딸아이는 결핵 접종을 하고 간 것이 잘못되어 길랑바레 신드롬에 걸려 서울에 돌아옵니다.


남편이 발병하고, 두 번의 가을을 지났었습니다. 두 해 모두, 남편은 전지훈련 계획을 세웠었습니다. 첫해에는, 심천에 가서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을 지도하고 왔고, 두 번째 가을에는 운동을 하는 것은 힘겨웠기에 가족끼리 함께 홍콩을 가서 잠깐 지도를 했습니다. 남편의 학부형께서 저희를 데리고 다녀 주셨는데, 증간에 울음을 참으시지 못하고 자꾸 화장실에 가서 눈물을 닦고 오시더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남편이 미국 가서 임상 실험에 참여할 수 있다면 완치할 수 있는 기적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오히려 마치 마지막인양 눈물짓는 그분들이 야속했습니다. 어차피 남편이 있어도 지금쯤이면 떠날 생각을 하고 있을 텐데 뭐가 그리 서운한지, 요즘은 꼼짝도 하기가 싫습니다. 남편이 살아있다면 상상도 못 할 만큼 게으르고 더럽게 살고 있는데, 드디어 오늘 저에게도 한계가 오더군요. 더 이상 집을 치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겠는 시점이 왔네요. 제 물건을 들추다 보면, 그의 물건이 눈에 띄어, 견디기가 쉽지 않네요. 예전에, 남편이 너무 바쁠 때, 물론 저도 바빴지만, 가끔 주말에 일을 하다가 백화점이라도 들르면, 가족끼리 쇼핑 나와 싸우던 부부들이 부러웠습니다. 저는 한 번도 남편에게 무엇을 의논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였고요. 나 이제 플로리다 가서 일해 한마디 하고는 3 일 만에 내려갔고, 독일에서 오라네 하고는 1달 안에 짐 싸서 내 일은 그냥 사직하고 떠나 버렸으니, 우리 집 사전에 의논이란 그리 유효하지 않았습니다. 무언이든 남편이 하는 일에 순종해야 된다는 엄청 고리타분한 교육 덕분인지 나는 그저 무엇이든 그가 하자는 대로 따랐습니다. 차라리 그때 조금 더 의견을 내고 바가지를 긁었다면, 그의 인생이 조금 더 편안했을까요? 후회해도 소용은 없지만, 그래도 뒤돌아 보면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네요.

플로리다를 방문 오신 서의호 교수님과 학생들

그동안 남편과 참 많은 곳을 다녔습니다. 아직도 그가 나타나 당장 내일 비행기 예약이 되었다고 준비하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리 남편과 여행 다니는 것이 싫었을까요? 이리 그리울 줄 알았으면, 그때 조금 더 따라다닐걸, 저는 남편의 학생들 이름도 잘 모르는 반푼이 아내였습니다. 너무도 그리운 그 사람.... 저는 이제 평생 그를 그리워하며 보내겠지요? 있을 때 잘하려고 부모님께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하는데, 힘겹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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