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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만의 가을이 왔습니다

옆구리가 미치도록 시리네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후 적당한 애도의 기간은 얼마일까요? 남편이 통화나 문자가 불가능한 먼 나라로 떠난 지 6개월이 넘어가면서 그가 없는 게 익숙해지는 것이 슬프네요. 그는 분명히 작년 오늘 제 옆에 있었는데, 여행을 아무리 길게 가도 3개월이면 돌아오던 사람이, 3개월이 2번이나 지나도 그는 이제 돌아오지 못하네요. 새로운 일들로 일상이 채워지고, 마치 그가 없었던 것처럼 세상이 돌아가는 게 야속하긴 하지만, 그래도 꾸역꾸역 살아있는 제 자신이 가끔씩은 무서워집니다.


타인의 불행을 마주하는 것이 쉽지는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동안, 코로나와 남편의 일을 핑계로 하지 않던 많은 일들을 이제는 슬슬 시작하고 보니,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과 마주치게 됩니다. 남편의 소식을 아시는 분들은 살며시 손을 잡아주시는 분들도 계시고, 미처 몰랐다며 함께 슬퍼해 주시는 분들도 계시며, 애써 모른 척,  예전과 같이 대해주시려 애쓰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소식을 모르는 지인들께서 잘 지내냐고 한마디 거시면, 저도, 남편의 소식을 아는 지인들도 얼음이 될 때가 있습니다. 넌지시 제가 홀로서기를 하는 중이라고, 남편이 여행을 떠났다고 눈치를 드리면 가끔 농담하지 말라고 웃어넘기시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저도 농담이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아닌걸 어떻게 설명해 드려야 할까요? 저도 아는데, 제가 혼자되기 너무 이른 나이라는 걸, 그가 너무 젊은 시절에 아쉽게 가버렸다는 걸,  그걸 굳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과부


과부란 말은 한자로 남편을 잃어 부족해진 여인을 뜻한다고 해요. 여성 비하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남편을 잃으면, 여러 가지가 부족해집니다. 둘이 벌다 혼자 버니 가정경제부터 타격이 오고요, 일상의 여러 가지 부분에서 함께할 때 얼마나 넘치는 삶이었는지 깨닫게 해 줍니다. 10월 초, 밤낮의 일교차는 제가 뜻밖의 것이 부족한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더군요. 그건 바로 온기였습니다. 낮은 한없이 따가운 가을 햇살이 내려 쪼이지만, 밤의 한기는 보일러를 돌리기에는 2% 부족한 그런 날씨에 억지로 잠을 청하며 제가 그리운 건 그의 온기였습니다. 인간의 온도, 36.5도가 딱 그리우며 앞으로 매년 10월이면 그가 그립겠구나 하면서 옆구리가 시리다는 말이 다큐로 저한테 훅 들어오더군요. 그것은 친정부모님이 살아계셔도, 자식이 있어도, 형제들과 친구들이 아무리 위로를 해 주어도 저 혼자 버텨내야 하는 저만의 몫이더라고요.


어릴 적 저의 세계는 온통 과부 할머니들뿐이었습니다. 일단 친가 외가 다 할아버지는 625 때, 혹은 그 이후에 돌아가시고, 할머니들만이 남아계셨습니다. 친할아버지의 5남 1녀 중 제가 얼굴을 뵌 할아버지는 한 분뿐, 나머지 할머니들은 다 혼자되셔서 저희 집에 수시로 드나드셨습니다. 수많은 큰할머니, 작은할머니, 이모할머니, 고모할머니들이 저희 집을 드나드시며 엄마 시집살이를 시키셨지요. 정작 제일 아무 말씀 안 하시는 분은 저희 할머니셨습니다. 온갖 할머니들은 저희 집을 드나드시며, 한복도 만들어 주시고, 고추장도 담가 주시고, 닭도 잡아 주시고, 고양이도 키워주셨습니다. 그 모든 할머니들의 공통점이 과부였다는 것을 저는 대학 가기 전에는 몰랐습니다. 아무도 할머니들을 과부라고 부르지는 않았지만, 딱 한 번, 아버지보다 11년 아래의 삼촌이 장가가실 때 누군가 과부집 아들이라고 흠잡히지 않게 모든 걸 준비해야 한다며 어마어마한 잔치를 벌인 게 기억납니다. 되돌아보면, 그 모든 할머니들이 50세 이전에 과부가 되었고, 그 긴 나날들을 옆구리가 시려가며 지나셨을 것을 그냥 그게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도 혼자셨습니다. 625로 큰 아들과 남편을 잃으신 할머니는 90세가 넘도록 어떻게 사셨을까요. 아직도 또렷이 기억나는 외할머니의 모습은 제가 아주 어릴 적, 외할머니댁에 가서 자고 일어나 몰래 엿본 모습이었습니다. 키가 자그마하시고, 언제나 곱게 쪽을 지셨던 외할머니는 아침 일찍 일어나셔서 쪽창으로 들어오는 아침햇살을 받으시며 성경책을 붙들고 기도를 하고 계셨습니다. 잠을 드시기 전에는 절대로 풀지 않으시는 머리를 미처 빗지도 못하시고, 하얀 속저고리와 치마를 입으신 할머니가 햇빛을 받으며 기도를 하시는 모습은 저에게 사진처럼 박혀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할머니 쉰도 되기 전에 혼자되셔서 근 50여 년을 더 사셨으니, 하루하루가 천년 같은 하루가 아니었을까요? 그 많은 날들을 새벽마다 기도로 이겨내셨을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저는 할머니의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할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가슴이 타들어가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어서요. 그래도 아직 새벽에 일어나 기도를 간절하게 하지 않는 것은 제가 배가 부르기 때문일까요? 사실 저는, 제가 어떤 모습으로 늙어 가야 하는지 길을 잃었습니다. 너무 씩씩해도, 너무 우울해도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는 제가 앞으로는 어찌 살아야 할까요?


주변분들은 제가 과부가 됐다고 하면, 기겁을 하십니다. 제가 무슨 홍길동도 아니고 제 자신의 상황을 국어사전에 있는 표준말로 표현을 하는데, 무엇이 문제일까요? 물론 제 성향이 과부보다는 이혼녀에 더 맞는 캐릭터라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생각을 하고 목소리를 크게 낼 줄 아는 여자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다 이혼을 하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물론, 결혼생활 30년에 위기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남편은 제가 생각이 있고, 큰 목소리를 내는 것을 존중해 주고 뒤에서 묵묵히 응원해 주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남편이기에 더 그립고 두고두고 아쉬운 것 같네요.

미망인?

날이 점점 추워져 갑니다. 테니스를 업으로 평생을 살았던 남편에게 추운 날씨는 이제 따뜻한 남쪽나라로 떠날 때라는 신호입니다. 작년 이맘때, 우리는 따뜻한 홍콩에 갔었습니다. 남편의 건강이 나빠지기는 했지만, 마지막 여행일 줄은 몰랐습니다. 홍콩에서 남편의 학부형께서 남편과 식사를 하며 눈물이 터져 몇 번을 화장실을 다녀오시는 줄도 모르고, 저희 식구는 함께 여행을 한다는 것이 무척 즐거웠습니다. 그는 살아있었어도 아마 이즈음이면 따뜻한 곳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은 그가 없는 겨울이 무섭지만, 보일러도 켜고, 이불도 두꺼운 것으로 바꾸며 저도 이 겨울을 보낼 준비를 해야겠네요. 저는 남편이 떠나고 미쳐 따라 죽지 못한 미망인이 아니라 그가 없어서 2% 부족한 과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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