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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teen Love

테니스가 그리도 좋을까..

제 남편은 테니스 선수였습니다. 제가 처음 만날 당시 테니스 선수였으니, 그를 테니스 선수로 보아야 하지만, 이상하게 저는 그가 그저 평범한 유학생으로 보였습니다. 당시 NCAA division1 대학 팀의 선수였던 그는 팀의 에이스였던 모양입니다. 아직은 인종 차별이 심하던 80년대, 남부의 중심인 앨라배마 대학팀의 선수였던 남편은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기사에 독사진이 한 면 가득히 실릴 정도였으니 엄청난 기대 주였었나 봅니다. 소년체전 우승, 국내 온갖 주니어 대회를 섭렵하고 세계 주니어 랭킹에 이름을 올린 첫 번째 한국 선수였고, 88 꿈나무였답니다. 그 훌륭한 테니스 선수 최희준은 혼자서의 유학생활이 버거웠고, 대학 공부가 힘들었었답니다. 마치 내가 테니스 꿈남무를 밟아버린 양, 나를 만나고는 테니스를 등한시하며 그저 평범한 유학생이 됐습니다. 테니스를 좋아하시던 시아버님께서는 못내 아쉬워하셨지만, 그의 마음은 테니스에서 멀어져만 갔습니다. 


그의 대학팀



1년에 한 번,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리는 시합에 그의 친구들과 선후배, 그리고 그의 멘토였던 닉 볼레테리가 와서 시합을 하면 친구들을 보러 가곤 했지만, 다시 테니스를 하라고 하는 닉 볼레테리의 잔소리도, 선수 안 할 거면 트레블링 코치라도 해달라는 그의 친구들의 부탁도 단호히 거절하고는 했습니다. 당시 꽤 유명했던 안드레아 아가시나 짐 커리어(그때는 별로 유명하진 않았지만) 같은 선수들이 와서 테니스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어보는 게 신기해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쪽팔리는 짓 하지 말라며 자기가 테니스는 더 잘 안다고 할 때는 좀 얄밉기도 하고 잘난 척하는 것 같아 꼴 보기 싫기도 했습니다.


인디애나폴리스 테니스 대회



체육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보건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으며, 그저 평범하고 잔잔한 일상을 기대했던 저에게 갑자기 플로리다의 모교에 가서 테니스 코치를 하겠다는 통보는 진짜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구실은 미국 영주권을 따겠다는 너무도 평범한 이유였지만, 내심 그는 테니스를 잊지 못했던 겁니다. 그리도 거절했던 모교의 부름에 그는 3일 만에 짐을 싸서 내려가 버렸습니다. 섭씨 40도를 넘나드는 플로리다의 여름을 덮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선수들을 가르치는 그의 열정에, 저는 주섬주섬 남은 짐을 싸 그를 따라갔습니다. 


남편이 찾아간 모교의 교장선생님과 후배


그가 어떤 선수들을 가르쳤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저는 잘 모릅니다. 그는 프로 선수들과 최상위권 주니어 선수들을 가르쳤고, 주말이면 그들의 시합을 따라다녔습니다. 선수였던 남편을 따라다니는 것도 피가 말랐지만, 코치인 그를 따라다니는 것은 더욱더 힘들었습니다. 시합을 계속 이기면 계속 시합장에 있어야 해서 화가 났고, 지기라도 하면 선수와 남편의 눈치를 보느라 찍소리도 못했습니다. 주중에는 훈련, 주말에는 시합, 그것도 늘 동네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 시합들을 가곤 했으니 이건 따라가도 힘들고, 따라가지 않아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습니다. 그나마 지역 대회는 주말만 가면 되지만, 큰 대회를 출전하면 몇 주씩 출장을 가곤 하니, 세상에 이렇게 불규칙하고 예측할 수 없는 삶이 있을까 싶더군요. 그나마 아기를 가지고 8월 초가 예정일이었는데 만약에 아기 낳을 때 없으면 그날로 이혼이라고 엄포를 놓아서 그런지 그 해에는 U.S. open에는 차출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 해가 남편이 U.S. open을 가지 않은 유일한 해 같습니다. 1월이며 호주, 3월 말이면 파리, 5월이면 런던, 8월이면 뉴욕... 참 끊임없이 다녔습니다. 서로의 분야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없는지, 어느 날 뉴욕에서 자기가 첼로 하는 중국 사람을 만났는데 참 좋은 사람 같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도대체 누군지 사진을 몇 장 보내주니, 요요마라 하더군요. 아니 와이프가 클래식 음악을 하는데 요요마를 모른다니 기가 막히지요? 선심이나 쓰듯 다음에는 연락하면 U.S. Open 티켓을 구해 주겠다고 했다나요? 마치 요요마는 티켓을 구할 수 없을까 봐 그랬나 보지요? 중국의 미션힐즈에서 테니스 아카데미를 할 때는 남편의 보스가 저보고 다음 주에 랑랑이라는 피아노 치는 연주가가 오는데 함께 음악회를 하라고 했을 정도니, 음악을 모르시는 걸까요 아니면 제 음악 수준이 남편처럼 월클이라고 생각한 걸까요? 


너보다 큰 바이올린 든 중국 아저씨-요요마


어찌어찌 서울에 와서 정착은 했지만, 그의 무대는 언제나 세계였습니다. 2003년 1월을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평소와 같은 토요일, 저는 음악영재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이형택 선수가 ATP 파이널에 올라 그 시합을 중계해 주는 겁니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어도 일은 일이기에 레슨을 하다가 함성이 터지면 나가서 보고, 또 보고, 진짜 아슬아슬한 게임을 봤던 생각이 납니다. 사실, 이형택 선수가 우승한다고 저한테 좋은 일이 생길 것도 아니지만, 남편이 온 힘을 다해 지도하던 학생이라 꼭 우승하기를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 해, 저는 이형택 선수에게 파이팅을 외쳐주는 남편의 모습을 티브이를 통해 더 많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랭킹이 올라가 시합이 무척 많아졌기에 남편 얼굴 보기 힘들었거든요.

이형택 선수와:할많하않..

 

그는 테니스를 무척 사랑했었던 듯합니다. 심장암 말기에 산소 포화도가 85까지 떨어져 119에 실려가면서도 호주 오픈 1 회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딱, 딱" 하는 테니스공 튀기는 소리는 언제나 방안을 메웠었고, 응급중환자실에서 잠시 깨어났을 때도 그는 호주 오픈 누가 우승했냐 물었습니다. 기가 막히더군요. 그래도 자기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일을 평생 하다 가는구나 싶어 그동안 나와 딸아이를 테니스 다음으로 생각했던 일을 용서했습니다. 




그가 떠난 지 어언 3년이 되어갑니다. 3월이 되면, 딸아이가 결혼을 합니다. 그는 물론, 함께하지 못합니다. 만약에 그가 살아있었으면 함께 했을까 생각해 보았는데 잘 모르겠더군요. 3 월이면 유럽에서 클레이코트 투어를 할 땐가요? 만약 그가 프로 선수와 계약을 하고 맡았더라면 아마도 못 오거나 아니면 결혼식 전날 들어와서 다음날 나갔겠지요. 테니스로 시작해 테니스로 매듭진 최희준 코치.. 아이러니하게도 오늘, 권순우 선수의 2 번째 ATP 우승 소식을 접했네요. 모두가 다른 선수를 응원하고 있을 때, 아시아 테니스 역사를 새로 쓸 선수는 권순우라며 3년 안에 일 낼 거라 하더니 진짜 일을 냈네요. 남편의 예언이 맞은 건지, 아니면 그냥 우연인지, 이제는 알 길이 없지만, 중요한 건, 그가 살아있었다면 딸의 결혼 못지않게 권순우 선수의 선전을 기뻐했을 거라는 것이네요. 


권순우 선수는 알까요? 최희준 코치가 탑 10안에 들 거라고 했다는 걸?

테니스로 시작해 테니스로 마무리진 고야아빠, 최희준 코치님, 하늘나라에서는 너무 테니스만 들여다보지 말고 딸 결혼도 좀 신경 써줘요! 아직도 나랑 고야는 테니스 뒷전인 게 섭섭하다오!!!


엄마와 딸의 입이 너무 나와 조류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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