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만함이 만들어낸 수재
나는 어릴 적 무척이나 부산스럽고 산만했던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유아기에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려는 성향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나의 어머니는 첫 아이인 나의 호기심을 산만함으로 생각하셨나 보다. 나의 어머니는 그 옛날에 명문대 교육과를 나오신 재원이셨고, 어머니의 친구분들 역시 교육에 무척 관심이 많으셨던 듯하다. 어머니는 친구분들 중에 가장 먼저 아기를 낳으셨고, 어머님 친구분들은 나를 너무 예뻐해 주시고 나의 교육에 대해 고민해 주셨던 듯하다.
운명은 참으로 어이없게 다가온다. 내가 만 세 살 무렵, 내가 산만해서 큰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으긴 어머니 친구분 한 분이 우연히 티브이에서 스즈키 바이올린 교육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시고는, 어머니에게
바이올린을 시키면 산만한 아이도 집중력이 좋아진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셨다. 첫아이인 나를 공부를 시키려면 집중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신 어머니는 당장 스즈키 교육법으로 바이올린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을 찾으셨고 나는 만 세 살을 겨우 넘기고 바이올린에 입문했다. 물론, 바이올린을 처음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가 기억하는 나의 모든 어린 시절은 바이올린과 함께였다. 아직도 어떤 집의 햇빛이 반짝이는 거실에서 선생님과 선생님의 사모님이 내 자세를 잡아주시고 활을 같이 쓰는 기억이 아련하다. 이렇게 나는 한글도 떼기 전, 바이올린을 시작했고 악보를 읽기 시작했다. 친절한 선생님깨 스즈키 교육법으로 바이올린을 배우던 이 시기는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즐겁고 부담 없이 바이올린을 했던 시기인 것 같다.
나는 바이올린을 꽤 빨리 배웠던 모양이다. 어느 순간, 나는 무서운 선생님께 하드 트레이닝을 받기 시작했고, 연습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꿀밤을 맞거나 엄청 혼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산만함 때문이었다. 나는 언제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유치원도 다니기 전, 교회 영아부에서 작은 발표를 하는데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아이들 줄을 맞추어 주고 있었고, 율동을 하다가 앉아 있어야 하는 대목에서 누군가가 카메라를 갖다 대는 것을 보고 발떡 일어나 포즈를 취해 담당 선생님이 기함을 하신 적도 있다. 바이올린을 하면서도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이 가득 차 있었고, 심지어 책이나 만화책을 몰래 읽으며 연습을 하다 들켜서 어머니께 딱 죽지 않을 만큼 맞은 적도 있다. 바이올린을 하면서도 내 눈은 언제나 뱅글뱅글 돌머 더 재미있는 게 없나 찾곤 했었다. 이쯤 되면 바이올린을 그만 시키실 만도 한데, 워낙 엄마 아버지가 음악을 좋아하셨고, 여자는 예체능을 시키겠다는 부모님의 강한 의지 때문에 나는 꾸역꾸역 바이올린을 했다.
어릴 적 나는 꽤나 똑똑했던 모양이다. 무엇을 해도 평균 이상은 해냈다. 물론, 체육은 잼병이었지만, 공부도, 바이올린도 또 글짓기도, 웅변도, 언제나 앞서갔다. 과외 선생님은 공부를 잘하니 법대나 의대를 가라 하셨고, 바이올린 선생님은 전공을 하라고, 글짓기를 지도하던 학교 선생님은 소설가가 되라고 하시며 웅변 선생님은 아나운서가 돼라 하셨다. 그 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어떻게 바이올린으로 진로를 결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모든 것을 특출 나게 잘해도, 결국 나는 바이올린을 해야 했다. 재미있는 것은, 초증학교 시절 나는 바이올린을 빼고는 전부 1등을 해 보았고, 전국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 만큼 특출 났다. 하지만, 무엇에 홀렸는지, 나의 진로는 바이올린으로 자연스럽게 결정되었고, 산만해서 바이올린을 시작한 나는 여전히 산만한 채 음악을 잔공 하기 위한 중학교에 가게 된다.
중학교에 가서도 나는 팔방미인이었다. 공부도 교우관계도 또 바이올린도 모두 평균 이상으로 잘하는 똑똑한 아이였다. 특출 나진 않지만 모든 면에서 하나도 빠지지 않는 나를 주변에서는 “수재”라 불렀다. 뜻도 모르면서 나는 수재라는 말에 어깨가 으쓱해지고, 수재라는 타이틀에 창피 하지 않도록 모든 일을 열심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