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서 2등은 꼴찌다.
지금으로부터 약 55년 전, 나는 교육학과를 나오신 어머니의 큰 딸로 태어나 어머님 친구분들의 관심 속에 만 세 살부터 바이올린을 하게 되었고, 꾸역꾸역 음악의 길을 걸어왔다. 예술 중학교에 예고, 만 17세에 국내 최고 권위의 콩쿠르 입상에 조기 유학까지 엘리트의 코스를 거쳐온 것 같은 내 인생은 알고 보면 2등 인생이다.
나는 4 남매의 맏딸이고, 부모님이 음악을 굉장히 좋아하시고 충분한 지원을 해 주셨지만, 산만해서 바이올린을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난 늘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일단 어릴 적에는, 내 밑의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던 것 같다. 내 밑으로 2 년 아래인 남동생과 연년생인 바로 그 밑의 남동생, 그리고 나와 5살 터울의 여동생까지 우리는 대가족이었다. 우리 식구들만 살았다면, 어쩌면 내가 그리 동생들을 챙겨야 한다는 사명감은 없지 않았을까 싶은데, 할머니를 모시고 살던 우리 집에는 사촌들이며, 고모, 고모부, 그리고 작은할머니에 큰할머니까지, 손님이 끊이는 날이 없었고 어머니는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를 도우시며 시집살이하시며, 우리들은 거의 도우미 언니들 손에 맡겨 놓으셨었다. 내가 유치원에 갔을 때 한글을 뗀 것도, 연습을 하라고 하면 방에서 악보대 위에 다른 책을 꺼내놓고 읽는 것도 어머니는 나중에야 아시게 되었고, 큰 딸인 내가 하는 일도 무심하신데 동생들에게는 더 신경 쓸 시간이 없으셨다. 남동생들은 남자아이들 답게 끊임없이 사건 사고를 일으켰고, 혹여 손자들이 다치는 날에는 할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기에, 나는 동생들 챙기기에 바빴다. 방에서 연습을 하면서도 쫑긋 하고 귀는 밖에 나가있으니 집중해서 연습을 했을 리가 만무하다. 그러고 보면, 난 언제나 멀티였었던 것 같다. 운전을 하며 화장을 하고, 티브이 틀어놓고 숙제하고, 나중에는 애 보며 연습하고, 하여간 여러 가지 일의 늘 진행되다 보니, 한 가지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어릴 적, 외할머니댁에서 함께 큰 사촌오빠들이 책을 무척 좋아했었다. 어린 동생들 때문에 외갓집에 자주 맡겨졌던 나는, 오빠들이 공부하면 같이 공부하는 척도 하고, 구구단도 함께 외우고, 책도 더듬더듬 따라 읽으며 마치 내가 오빠들만큼 훌륭한 것처럼 느껴졌기에, 책은 항상 좋아했다. 어릴 적, 밤에 책을 읽으면 눈이 나빠진다는 어머니의 불호령에 불을 끄고는 이불속에서 적은 손전등을 켜고 읽던 책들은 아직도 외울 수 있을 만큼 읽고 또 읽었다. 이리도 책을 좋아하고, 공부도 곧잘 했던 내가 바이올린을 못 헸다면 인생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런데 나는 공부도 바이올린도 어중간히 잘했다. 전교 1등은 아니지만 전교권 등수를 유지했고, 초등학교 때 이화경향콩쿠르에 나가서 1등 할 실력도 못됐지만, 예술중학교는 가고도 남았다. 당시는 중학교만 가면 귀밑 1 센티 단발을 하던 시대라, 커트머리를 하는 예원에 나는 가고 싶었고, 무난히 합격을 했다. 학교생활은 재미있었고, 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학교생활을 해갔다.
중학교에 다니면서, 나는 공부도 바이올린도 한 번도 전교 1등을 한 적이 없었다. 학교가 끝나면 떡볶이 사 먹고 배재중 다니던 사촌오랑 만나서 낄낄대며 집에 오고, 연습은 레슨 가기 전날 벼락치기로 하고, 공부는 그냥 수업시간에 듣는 것만큼으로도 나쁘지 않았다. 나의 이런 행복한 일상에 일침을 놓은 것은 교육과 출신 어머니셨다. 어머니는 내가 바이올린이나 공부나 한 가지만 하면 잘 할 텐데 두 가지 다 잡고 제대로 못하는 것 같다시며 나에게 일반 고등학교에 진학하라 하셨다. 무론, 어머니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나를 수학능력을 과대 평가한 과외 선생님의 부채질과 서울의대 다니며 나를 가르치던 사촌오빠의 부추김이 있어서, 악기 대신 의대를 가라고, 예고 진학을 반대하셨다. 하지만, 학군지도 아닌 시내 한복판에 사는 나에게 일반 고등학교에 가라는 것은 거의 벌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예고에 가서 일반대학으로 진로를 바꾸겠다 약속하고, 예고 입시를 보았다. 이 입시에서 그냥 붙기만 하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지만 나는 서울예고 바이올린 실기 수석으로 붙었고, 교복자율화 시행 후 첫 입학식에서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고 입학 축하 독주를 했다. 당시 예고 학생들은 교육청이나 문교부 행사에 가서 연주를 하곤 했는데, 마침 내가 입학하던 해에, 음악부장님이 바뀌셔서, 임시로 음악부장님을 맡으신 초임 음악선생님께서는 선배들이 했어야 할 행사까지 나와 피아노를 쳤던 친구에게 몰아주셨기에, 3월 한 달을 거의 수업을 안 들어가고 여기저기 연주를 다녔던 것 같다. 그리 수업을 빠지니, 당연히 학과 성적은 내려가고, 나는 수석입학을 앞세워 바이올린을 하겠다고 우겼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뭐 그리 음악이 좋았을까도 싶지만, 나는 바이올린이 그저 좋았다. 하지만 나의 성적은 입학 이후 2,3,4 등으로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2가 되니, 어머니가 또 일반대학을 가라 하셨고, 나는 국내 최고 권위의 콩쿠르에 입상해 보이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그때 왜 내가 1 등을 한다고 하지 않고 입상하겠다 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너무 쟁쟁한 선배들이 나올 것을 알고 있어서 그랬을까? 아무도 나는 2차 예선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는 그 콩쿠르에서 나의 선배가 아닌 타 예고에 진학 중인 동기에게 밀려 2등을 했다. 2등도 무척 잘한 것이지만, 무엇이 그리 서글펐는, 발표가 난 후 세상이 떠나가라 울었던 생각이 난다.
콩쿠르 이후, 나는 유학을 가겠다고 선언을 했다. 보수적인 우리 집에서는 생각도 못할 일이었는데,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또 하나의 도전거리를 주셨다. 유학 준비는 알아서 할 것과 서울대학교 입시를 준비할 것, 그리고 뉴욕이 아닌 미국으로 유학을 갈 것. 부모님 생각에 유럽은 너무 외로울 것 같고, 뉴욕은 위험하다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나는 혼자 사전을 넘겨가며 학교를 알아보고, 깅골드라는 교수님이 계신 인디애나 대학에 유학을 가기로 하고 교육청에 찾아가 허가를 받고(당시는 유학을 가려면 신문사 콩쿠르 입상이나 대학을 졸업했어야 했다), 미국 대학에 편지를 쓰고, 녹음을 해서 보내고 하며 유학 준비를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서울대 입시 준비도 해야 했다. 학력고사도 꽤 좋은 성적으로 나오고, 서울대 입시곡으로 치른 고3 마지막 실기시험에서도 1등을 했으니, 뭐, 중간이야 어떻든 난 서울예고 바이올린과 수석입학, 수석 졸업자다.
마음이 급했던 나와는 달리, 미국 유학절차는 느릿느릿 진행됐고, 나는 서울대 입시를 5일 앞둑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입학허가서를 받았고, 서울대학교 ㅣ험이라도 치르고 가라는 아버지의 말울 듣지 않고 동기들이 시험을 치르는 날, 미국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렇게 나의 2 등 인생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