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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 인생(2)

음악에 2등은 꼴찌다

서울서 1등 같은 2등만 하다가 청운의 꿈을 품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나로서는 당시 줄리아드나 커티스보다는 덜 유명했던 인디애나 주립대학에 갔는데, 나의 1등의 꿈은 미국 도착 2주 만에 산산조각이 났다.




당시 인디애나 주립대학에는 이자이의 제자이자 바이올린 교육계의 큰 별이신 조셉 깅골드 선생님이 계셨다. 이미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셨지먼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서울서 테이프를 만들어 보내고 나서 나는 깅골드 선생님 클래스에 합격을 했지만, 생각보더 수속이 늦어져 마침 내가 간 학기에 선생님은 안식년을 하시며 마스터 클래스만 진행하셨다. 영어라고는 한마디도 못한 채 미국에 도착해 어찌어찌 적응하던 초창기,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마스터클래스 참관을 하러 오라 하셨고, 그게 어떤 클래스인지도 모른 채 나는 마스터 클래스에 들어갔다. 당시 깅골드 선생님의 대표 학생은 조슈아 벨(Joshua Bell)이었다. 서울에서 이미 음반을 통해 알고 있었던 연주자고. 나랑 동갑이라 조슈아가 들어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콘체르토 1악장을 멋들어지세 연주할 때만 해도, 아~ 잘하는구나, 나도 연습하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정도였다. 내가 진짜 충격을 먹은 것은, 조슈아 벨 둬에서 연주룰 한 희랍임 조르바 같이 생긴 그리스의 바이올리니스트 때문이었다. 연습실 휴게실에서 서투른 영어를 하며 같이 커피를 빼 마시던 산적(?) 같이 생긴 나와 동갑이라는 그 아이는 전혀 바이올린을 하게 생기지 않았었다. 키는 180 정도에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콧수염을 기르고 조각 같은 외모에 언제나 연습실 근처를 배회할 뿐 연습하는 모습은 그 2주 동안은 별로 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조슈아 벨에 이어 등장한 그 친구는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을 마치 CD처럼 완벽하게 연주했다. 바이올린은 그의 체구에 비해 너무 작아 보였고, 장난감 다루듯이 파가니니를 연주하는 그 친구는 마치 바이올린의 신 같았다. 파가니니 24번을 듣고 너무 놀라 있는데 깅골드 선생님은 그에게 파가니니 1번도 들려줄 수 있냐고 하셨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머리를 긁적이던 그 친구는 “아, 1번 펼쳐본 지 3개월쯤 됐는데요” 하더니 음이탈 하나 없이 완벽하게 연주했다. 세상에!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도 아닌 18살의 동갑 친구의 연주에 그렇게 놀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기기 막히면서 허탈해졌다. 여기서도 1등은 어림도 없군 하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유학을 왔는가 하던 현타가 오던 시간이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그 친구가 레오니다스 카바코스였다는것을. 시벨리우스 콩쿠르에 1등을 하고 인디애니폴리스 바이올린 콩쿠르 유력 우승 후보였다는 사실을. 어릴 적 훈남 이미지는 없어져 훗날 그가 서울에 와서 연주를 해도 못 알아보다가 미국 친구가 알려줘 20여 년 지난 후에야 알았다. 첫 마스터클래스에서 마주한 2명의 거장(지금은 거장 반열에 올랐다)들은 나를 의기소침하게 만들었고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을 식혀버렸다.

내가 처음 본 그리스의 조각 같던 카바코스/지금 모습과 확연히 다름



그때는 몰랐다. 2등도 열심히 하면 1등은 못돼도 그 분야의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음악도 마찬가지다. 나의 음악인생동안 계속 1등 만을 만난 것은 아니다. 1등이 아니어도 꾸준히 노력하는 친구들은 훌륭한 선생님, 학자 또는 좋은 오케스트라 연주자가 되기도 했다. 나는 왜 유독 1등에만 목숨을 걸고 2등은 꼴찌라고 생각했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나는 엘리트의 덫에 걸렸고, 나 자신이 쳐놓은 이 덫에 골려 넘어졌나보다.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그동안 큰 노력 없이도 나의 목표에 너무 쉽게 도달했기에 끈기가 모지랐는지도 모른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큰 인생의 목표보다는 당장 눈앞의 불 끄기에 급급했다. 당장 시험, 강의, 육아, 연주 등 코밑에 닥친 일들을 해결하다 보니 정작 큰 목표는 세우지도 이루지도 못한 채 그저 모든 일을 “해내며” 살아왔다. 그래서 언제나 내가 원하는 것이 무언지도 모르며 성인생활의 대부분을 보내다 보니, 내 학벌에, 커리어에 성취한 것이 너무 없다고 걱정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하지만, 나는 전혀 후회는 없다, 주어진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기에, 그리고 그때 하는 일들은 언제나 기대 이상으로 잘해왔기에, 이럭저럭 만족한다.



나는 어떤 일이 주어져도 해 낼 수 있는 똑똑한 수재였다. 60년대 생의 여자로 태어난 나에게 이것은 득 보다 실이 더 많았을 수도 있다. 남자를 이겨먹는 여자는 필요 없던 시절, 그래소 우리 부모님은 내가 여자답게 예능을 하고 시집가서 조용히 남편 뒷바라지를 똑 부러지게 잘하기를 바라셨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안주하기에는 너무 자아가 강했던 나는 방향을 잃고 헤매다 결국 목표 없이 표류했다. 수재였던 나를 얌전하고 조신한 딸이 아닌 이 사회를 위한 인재로 키우셨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나의 2등 인생이 그렇게 처절한 패배로 느껴졌을까, 가끔 반추해 본다. 주변에서의 어떠한 칭찬과 격려도 2등생인 나에게는 그저 동정 같았다. 왜 나는 나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찾지 않고 1등에 목을 매었었는지. 또. 실력만으로 1 등을 겨루던 시대에서 결국에는 집안의 배경과 재력이 1,2등을 갈라놓는 것을 보면서도 내가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이률 수 있다 생각하던 내 자신의 미련함이 가끔은 후회스럽다. 그래도 내가 꺾이지 않는 것은 그 모든 슌간 순간만큼들은 최선을 다했고, 최상의 결과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음악인생은 2등으로 화려한 실패를 했을지라도, 나는 음악을 통해 배운 뚝심과 배짱으로 한 번뿐인 내 인생을 가장 멋지고 아름답게 살아간다고 자부한다. 큰돈을 번 것도 아니소, 엄청난 명예가 있는 것도 아니지만, 음악을 사랑하고, 나누어 주고 내가 맡은 일들을 충실히 해내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이, 1등을 하지 못해 애쓰고 악다구니 쓰던 지난날들보다 소중하고 행복하다.



꼴찌도… 행복할 수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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