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D Aslan Mar 22. 2021

전공의 일기

5-37

이상한 꿈을 꾸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짙은 어둠 속에 나 홀로 떠다니고 있었고, 형체를 알 수 없는 파도가 계속해서 나를 덮쳐왔다. 도움을 요청하려 입을 열면 어둠이 밀려들어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벗어나려 해도 끝이 없이 계속해서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 기괴한 상황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치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일어나 보니 땀으로 베개가 흠뻑 젖어있었다. 할아버지를 뵙고 난 뒤 마음이 뒤숭숭한 탓인지 평소에 꾸지 않던 꿈을 꾸었다며, 이상한 일이라 생각하고는 다시 잠을 청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언제나처럼 불쾌한 진동에 눈을 떴다. 출근 준비를 위한 알람이 울린 것이었다. 아내와 아기들이 모두 곤히 잠에 들어있던 터라 조심스럽게 알람을 끄고는 방을 나섰다. 


이제 겨울에 접어든 새벽 집안의 공기는 차가웠다. 정신을 차리려 물을 한잔 따라 들고는 밤새 있었던 일들을 파악하기 위해 메신저를 열었다. 




[오전 4시 34분 H 교수님 환자분 000 님 사망하셨습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며칠은 더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가셨구나.'


먹먹한 가슴을 부여잡고 병원에 도착해서 할아버지의 병실을 찾았다. 


내가 병실에 도착했을 때에는 침대에 새롭게 깔려진 새하얀 시트가 할아버지의 흔적을 이미 지워버린 뒤였다. 


예상했고 준비했던 상황이지만,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기에 실망이 컸다.


할아버지가 누워 계셨던 침대 곁에 서서 무겁고 비통한 마음을 다잡기 위해 기를 썼다. 


눈물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하얀 시트에 반사되는 햇볕이 이별의 공간에서 찬란하게 대조를 이루어 나의 슬픔을 더했다.


https://pixabay.com/ko/photos/


'가셨네요. 인사도 없이. 안녕히 가세요. 이제는 아프지 마시고요. 푹 쉬세요. 그래도 오늘 저는 좀 보고 가시지......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저는 할아버지 걱정 많이 했는데 서운하네요. 어제라도 얼굴 보여주셨으니까 용서해드릴게요. 그건 고마워요. 할아버지. 지금 와서 하는 얘기지만, 중절모 진짜 잘 어울려요. 머리 가운데 벗겨진 거 가리려고 쓰신 거 아는데요. 모자 벗었을 때보다는 중절모 쓰셨을 때가 훨씬 멋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챙겨서 쓰세요. 그리고 이제는 엄살 좀 그만 부리세요. 점잖은 얼굴로 아프다고 살살하라고 하실 때면 제가 얼마나 밍구스러웠는지 아세요? 나름대로 실력 있다고 자부하는데 시술할 때마다 아프다고 하시니까 제가 자존심이 좀 상했어요. 그것도 그렇고 주변 사람들이 걱정해요.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엄살 부리지 마세요. 전화번호 알려드리지 않은 건 죄송해요. 업무규정상 어쩔 수 없었어요. 전에 적어주신 쪽지는 아직도 잘 보관하고 있어요. 이런 상황이 올까 봐 보관하고 있던 건 아닌데 할아버지 생각날 때마다 열어볼게요. 저 할아버지 장례식에는 안 가려고요. 제가 죄송스러워져서 웃고 있는 할아버지 사진을 다시 볼 용기가 없어요. 나중에 뵙게 되면 그때 맛있는 밥 얻어먹을게요. 다시 한번 당부드리는데요. 아프지 마세요. 저 이제 병실에서 나갑니다. 이제 진짜 안녕히 가세요.'


할아버지가 떠나셨다. 텅 빈 할아버지의 병실처럼 하루가 공허했다.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의 부고를 아내에게 전했다. 그동안 할아버지와의 일들을 아내에게도 얘기했던 터라 아내도 나와 같은 마음으로 할아버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자기야, 할아버지 장례식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야? 자기한테 특별한 할아버지셨잖아."


"안 갈래...... 그냥 이렇게 보내드릴래."


"진짜 안 가봐도 괜찮겠어?"


"응. 안 갈래 여보. 이미 인사드렸어. 나중에라도 뵙게 되면 꼭 내가 밥 한번 얻어먹겠다고. 안녕히 가시라고...... 푹 쉬시고 중절모는 꼭 쓰고 다니시라고...... 보고 싶지만 참겠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