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읽고
예술가 중엔 왜 LGBT가 많을까?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2022'를 읽는 도중 든 생각이다. 기실, 이 역시 이성애 중심의 구획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질문임이 분명하지만 나름의 답을 찾고 싶었다.
[+인간, -백인, - 남성, +내국인, +비장애인, +이성애자, +(?) 청년]
나란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면 대충 이 정도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는 세상의 권력관계에서 비교적 우위를 점하는 쪽의 속성을 표시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에 해당하는 속성을 꽤나 많이 가지고 있다. -에 해당하는 것은 동양인, 여성이라는 것 정도. 여성 혐오 범죄에 분노하고 8년 전 유럽여행에서의 인종차별을 아직도 곱씹는 나는, 내가 소수자에 속한 세계의 규칙에만 의구심을 품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여성이자 동양인으로서 불리하게 굴러가는 사회 구조에 대해서는 분노하면서도 '저기압일 땐 고기 앞으로!'를 외치며 육식을 멈추지 못한다. 동남아시아 출신 부인을 둔 중년 남성을 보면 으레 '매매혼이겠지'라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장애인 인권에 관하여는 단 한순간도 숙고하지 못한 채, '병신'이라는 욕을 스스럼없이 한다. LGBT에 관하여는 '내 주위엔 그런 사람 없는데?'라며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다.
세상의 규칙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것은 운 좋게도 많은 측면에서 다수자에 속한다는 방증이다. 내가 처하지 못한 소수자의 입장에 완전히 공감한다는 오만은 부리지 않겠지만, 적어도 이 세상 한 귀퉁이에서는 숙고하지 않는 나의 존재 자체가 폭력일지도 모른다는 반성을 해 본다.
세상을 비뚜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은 세계의 규칙에 대해 숙고하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다. 인간의 삶을 다루는 예술가라면 더더욱 이 세계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할 터, 비뚜름하다 못해 전위적인 시선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내가 단 하루라도 '무지의 베일'을 쓸 수 있다면 비뚜름한 시선을 가질 수 있겠으나, 가능하지 않다. 여성으로서, 동양인으로서의 실제 경험만이 소수자로서의 감각을 줄 뿐이다. 짧은 글을 마무리하며 내가 처음 던졌던 '왜 예술가 중에는 LGBT가 많을까?'라는 질문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가 생각한다.
오늘도 나는 유해하다.
생각의 실마리를 준 책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 2022, 임솔아 외
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사람, 장소, 환대, 김현경
영화 <시니어 이어(2022)>
헤이트(왜 혐오의 역사는 반복될까), 최인철 외
아무튼 비건, 김한민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