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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별 Dec 19. 2024

[스타트업] #4. 사막 한가운데


사내벤처 공모전 2차 인터뷰 날이 되었다.


호기롭게 연차를 내고 평고 입지도 않던 치마까지 챙겨 입었다. 막연히 누군가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모양이다. 스타트업 느낌으로 후디에 청바지 정도 갖춰 입을 걸 그랬나.


버스를 타고 장소에 미리 도착했다. 13년간의 주입식 직장생활에 성실함만 늘다 보니 약속에 늦는 것이 정말 싫다. 여유롭게.. 최대한 여유롭게.. 2시간을 기다린다.


덕분에 긴장이 피로에 녹아버렸다.


팀원은 나보다 더 긴장한 눈치였지만 왠지 모르게 목소리는 더 차분했다. 부럽다. 내 습관 중 하나는 본능적으로 상대의 장점을 찾는 것인데, 문제는 한발 더 나아간 부러움이다. 그냥 장점만 칭찬하면 될 것을 왜 꼭 부러워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발표가 끝나자 질문이 쇄도했다. 여기서 쌈닭이 되면 곤란하다. 몰라도 알아도 일단 겸손하되 자신 있게 답변을 해 본다. 이게 사내벤처가 아니라 정말 투자금을 유치해야 하는 야생의 프레젠테이션이었다면 그냥 사막 한가운데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찰나에 스친다.


후. 스타트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군...




발표가 끝나자 마음이 평온했다.


아마도 별다른 욕심이나 기대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욕심이 있었다면 집에 가는 내내 머리카락을 부여잡고 모든 순간을 되감기하며 자책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은 할걸... 그 말은 하지 말걸..."


한편으로는 인터뷰를 통과한 5팀이 다시 3차 데모데이를 위해 경쟁해야 한다는 사실도 마음이 편치 않았기에, 선정 여부는 하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제는 기대하지 않는 것들이 기대하는 것 이상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최종 5개의 아이디어에 선정되었다.


잘 된 것은 나의 아이디어와 전략 덕분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싶지만 아직 이런 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미덕이 허락하는 범위가 아니니 자중해야지.


아무튼 2024년, 낯선 업무에 불려 와서 내내 못한다. 잘해라. 소리만 듣다가 거의 처음으로 내 손으로 성과를 만들어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뿌듯했다.  


정말 우리가 스타트업이란 것을 해볼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


그 곳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지 않는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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