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이겨낼

죽으란법은 없구나! - 4월 그날의 일기

by 모야

자기야.

괜찮아. 잘될 거야.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너를 위해 조용히 손 모으고 있어.

받은 사랑으로 단단히 첫걸음을 뗀 만큼,

이 또한 너의 힘으로, 우리의 힘으로

천천히 이겨낼 거야.

우리, 씩씩하게 가보자.


4월 19일.

부산의 또 다른 병원에서 MRI 결과를 받았다.

결과를 들으러 가는 길,

혹여 이전보다 더 깊은 절망이 우리를 덮치지는 않을까

남편도, 나도 밤새 뒤척이기만 했다.

제대로 쉬지 못한 탓에

눈은 뻐근하게 충혈됐고

머릿속은 묵직하게 울렸다.

떨리는 마음에 먹던 한약마저 넘기지 못했다.


병원에 닿자 심장소리가 귀 끝까지 올라 차오르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작은 떨림까지 나누며 기다렸다.

‘제가 남편보다 조금 더 단단해지게 해주세요.

울지 않고 안아줄 수 있는 힘을 주세요.’

마음속에서 조용한 기도가 몇 번이고 피어올랐다.


잠시 후 남편 이름이 불리고,

의사 선생님 앞에서 모니터 속 MRI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CT보다 더 자란 종양,

압박에 밀려 삭아버린 뼈,

뇌 중앙까지 깊숙이 파고든 그림자.

아래로 길게 내려앉은 흔적까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새로운 이야기들.


그런데 이전 병원에서는 손쓸 수 없다던 상황이 이곳에서는 달랐다.

선생님은 근처 대학병원에 제자가 있다며 바로 연락해보겠다고 했고,

혹여 서울에서 하지 않을 경우 직접 예약까지 도와주시겠다고 했다.

그의 진정 어린 설명은 단단한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다.


울 틈도 없었다.

‘아, 우리가 이 병원을 잘 찾아왔구나.’

둘이서만 품고 있던 무거운 말들은

의사의 입을 통해 희망과 가능성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피어났다.

“이 정도면 자이언트 종양입니다.”

뼈가 녹았으니 오히려 수술하기는 수월할 거라는,

위로인지 농인지 모를 말에 나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어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더 나쁘지 않다’는 사실 하나에 감사와 안도가 동시에 밀려왔다.

그 마음으로 남편을 바라보았는데, 남편의 표정은 한없이 어두웠다.

멍해진 얼굴, 감정이 비워진 눈동자.

순간 가슴 밑바닥이 철렁 내려앉았다.

처음 진단받을 때도,

내가 크게 울음을 터뜨렸던 순간에도

단단하던 사람이었는데—


뒤늦게 들으니

사라진 뼈,

더 자라버린 종양,

그 모든 장면이 남편에게는

폭우처럼 떨어졌던 모양이었다.

이제야 실감이 났다 했다.

그 말이 뼈아프게 들렸다.


당연히 무서울 것이다.

아니, 누구보다 남편이 제일 두려울 것이다.

그러면서도 참 다행스러웠다.

지금 내가 남편보다 조금 더 단단해져서,

남편에게 어깨와 품을 내줄 수 있어서,

그의 표정을 읽고 마음을 묻는 사람이

내가 될 수 있어서.


원무과에서는 산정특례를 바로 등록해주었다.

유사 암인지, 정식으로 암으로 분류되는지,

앞으로 감당해야 할 금액은 막막한 숫자였지만

건강보험이 도와준다는 말에 참 많은 감정이 스쳤다.

월급에서 빠져나가는 금액을 보며 ‘아…’ 했던 순간들이 떠올랐지만

이렇게 돌려받고 싶진 않았고,

차라리 아무도 아프지 않아

이 도움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럼에도 내 남편이 아플 때

이런 보호막이 되어준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지.

남편이 가족에게 부담이 될까

조심스레 걱정하던 그 순간들마저

조금은 덜어낼 수 있어 참 다행이었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성실히 낸 보험료들이 이렇게 모여

내 남편을,

또 다른 누군가의 하루를

조용히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감사했다.


대학병원까지 가야 한다던 등록도

이 병원에서 한 번에 해결해줘

모든 것이 한결 수월했다.

또 하루가 지나갔다.


오늘 나는

조금 더 단단한 배우자로

남편의 옆을 지킬 수 있었다.


슬픔과 당혹감을 함께 나누어 준 남편,

나와 같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있어 주어 고맙다.


밥 잘 챙겨 먹으라며

매 끼니 연락해주는 친구들,

남편의 회복을 위해

자신의 운세를 모두 내어주겠다며 웃던 지인들,

언제든 쉬어도 좋다며 다독여주는 회사 사람들.


우리는 정말 많은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나 보다.

그러니 얼른 회복해서

하나하나 마음으로 갚아가자.


잘될 거야,

조금 더 밝은 세상이 우리에게 오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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