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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까망별 Jul 04. 2022

10년 더 살아보자

새 여권


여권을 새로 발급받았다.




기분이 묘했다.

10년짜리 여권.

이걸 받을 때마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다.


마치 향후 10년을 더 살아가려면 누군가에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 같은.


누군가 나에게


, 다음 10  줄게. 이번엔 어떻게 살래?"


라고 허락과 숙제를 같이 던져주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런가... 구 여권을 새삼 소중하게 한 장 한 장 넘겨보며 지난 10년의 삶을 돌아보게 된다.




2012년에 발급받은 나의 구 여권은 미국 변호사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던 싱가포르의 삶부터 작년에 그만둔 한국 대기업의 삶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아, 지난 2년이 코시국이었기에 해외를 나간 적이 없으니, 10년짜리 여권이지만 정확히는 8년간의 기록이겠다.)


8년 동안 여권 한 권을 다 못쓰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텐데, 나는 중간에 사증을 이미 다 채워서 '사증 추가'를 했고, 그 추가분도 빽빽하게 다 채웠다.


여권의 사증    장이 모두  30대가 치열하게 존재했음을 증명해 주는 증명서 같다.


나 그때 이렇게 열심히 돈 벌고 있었어! 나 그때 정말 고되게 달렸어! 나 그때 너무 힘들어서 도망 다녔어! 나 그땐 너와 많이 즐거웠어!라고 한 장 한 장 모두 외치고 있는 것 같아. 그 안의 스탬프 하나하나가 '응, 알아. 너 참 잘했어'라고 인정해 주는 것 같아.



타국에서 여러 인종의 외국인들 사이에서 또 다른 외국인으로 시작한 로펌 생활의 외로움이 서울과 싱가포르를 왕복한 횟수로 드러나고, 한국 로펌에서 밤을 지새우며 뇌 세포를 쥐어짜던 날들 중에 또 그 안에서 시간을 쥐어짜 여기저기 쏘다닌 흔적들도 눈에 밟히고, 계획에 없던 장기 미국 출장으로 3개월간 하얏트 리젠시에 살았던 황당했던 기간도 보인다.


빡빡함, 퍽퍽함, 빽빽함.


그런 유사한... 무언가 너무 많이 결집한... 고밀도로 뭉쳐진 그런 시간, 사람, 일..... 삼십 대를 정리해 보면 그렇다.


이삿짐  시간이 없다며 마구잡이로 던져 놓은 짐들 속에서 새로운 물건만 계속 사며 버둥거렸던 느낌이다.


로펌을 박차고 나와 좀 더 편하게 월급 받아볼 요량으로 기업으로 도피했더니. 그곳은 도피처가 아니라 역마살의 중심축이 되었고. 그리하여 살면서 안 가봐도 될 곳, 갈려고 상상도 하지 않던 곳들로 이리저리 훨훨 쉼 없이 쏘다녔다.


미국, 중국, 유럽은 기본이고, 칠레를 1년에 세 번, 파나마를 1년에 두 번, 인도네시아를 2년 동안 총 10번, 그리고 이름 모를 중국의 도시들과 브라질까지...



후우- 후우- 후우우-


다시 읊어보기만 해도 숨이 찬다.


물론 행복하고 즐거웠던 여행의 흔적들도 많다. 남편과 자주 갔던 일분의 도시들,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서부 여행 같은 것들. 소위 '힐링'이란 것을 하겠다며, 틈틈이 캄보디아에 교육 봉사, 우물 기부 등등을 한답시고 5년간 씨엠립을 8번이나 다녀온 흔적도.



이제 새 여권을 받았다.


이번 여권은 좀 한가하게 채우고 싶다. 여백의 미. 뭐 그런 것도 조금 바래본다.


조금 심심하고, 때론 따분할 정도로 천천히 가보고 싶다.

비어 있는 것을 불안해하지 않고 싶고,

가득 채운다고 해서 무거워지지 않고 싶다.


그렇게 결심했다.


지난 10년간 구 여권을 채워온 것이 모두 나의 선택이었듯이, 이제 내가 새롭게 선택한 삶의 방식은 10년 뒤 구 여권이 될 이 여권이 증명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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