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언제 놀아?

우리들

by 딜리버 리

영화 완성도와 줄거리와 상관없이 기억에 남는 영화 대사가 있다. 근육질의 아놀드 형이 쇳물 속으로 들어가며 말했던 I'll be back, 꽃미남 시절의 디카프리오가 뱃전에서 외치던 내가 세상의 왕이다 처럼. 주로 미래에 대한 약속(복수, 성공 등등)을 비장미 넘치는 표정과 믿음직한 목소리를 내는 남자들이 뱉는다.


유명 감독과 배우가 나오지 않고(너무 자연스러우면 어색할 수 있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연기자가 아닌 주인공이라니!), 극적 전개와 반전은 1도 없는 영화를 어떻게 해서 보게 됐는지 기억나진 않는데 어쨌든 예전에 봤던 영화, <우리들>. 도서관 책장을 훑던 중에 표지가 익숙해서 집어 들었다. <우리들> 오리지널 각본집. 한국을 대표한다는 유명 감독들도 웬만해선 안 만드는(여러 이유 중에 장사가 안 되는 것도 클 듯) 각본집을 10만 명도 보지 않은 영화를 만든 감독이, 더구나 10년이 지난 영화의 각본집을, 82년생 윤가은! 남들이 뭐라든 본인은 계속 놀고 있었구나. 대단하다!


새로 사귄 친구와 관계가 꼬일 대로 꼬이고 풀리지 않아 감정이 쌓일 대로 쌓인 주인공이 같이 노는 친구에게 맨날 맞는 동생에게 너도 맞서 때리라며, 걔가 안 그럴 때까지 때리라며,


-야, 이윤! 너 바보야? 그러고 같이 놀면 어떡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 그럼 어떡해?

-다시 때렸어야지!

-(놀란다) 또 •••?!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그럼 또 때렸어야지! 걔가 안 그럴 때까지, 끝까지 때렸어야지!


누나의 잔소리에 혼란스럽고 조금 짜증도 나는 윤. 문득 선을 보고 말한다.


••• 그럼 언제 놀아?


당황하는 선. 뜻밖의 질문에 숨이 턱 막혀온다.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호가 또 때리고, 나도 또 때리고 •••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


누나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던 동생은 지금 같이 놀아줄 친구가 필요하지, 앞으로 일어날 이해득실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비장미와 결연한 태도, 믿음직한 목소리와 전혀 관계없는 남자아이의 대사가 선명하게 남았다. 나이 들수록 마음을 나눌 친구가 필요하다는데 나는, 너는 뭣이 중한 지를 모르고 있다. 친구랑 그냥 놀고 싶은데, 그렇게 놀면 되는데...


영상으로 먼저 접했던 대사를 글로 읽으니 영화를 볼 당시엔 휙휙 넘어갔던 장면에 이런 세세한 설정이 있었구나 알게 된 건 복습의 효과다. 글이 영상보다 섬세하지 싶은데(아닌 경우도 있겠지) 글이 영상보다 먼저인 건 확실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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