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방길 초록 풀숲 사이 짙붉은 꽃잎이 하늘하늘하다. 스마트렌즈로 찾아보니 양귀비꽃이었다. 중국 4대 미녀 중 한 명이었던 양귀비만큼 고혹적인 색깔로 흔들거리는 양귀비꽃. 덜 익은 양귀비 열매에 상처 내어 나오는 액을 말린 것이 아편이다. 아편 성분이 포함된 제재로 모르핀, 코데인, 헤로인 등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이 모르핀이다. 모르핀(Morphine)이란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꿈의 신 모르페우스(Morpheus)에서 따왔다고 하니 그 효과에 딱 맞는 이름이지 싶다. 625전쟁 때 의무병 소지품엔 압박붕대, 지혈제와 더불어 모르핀 12개가 포함되어 있었으니, 총탄이 날아다니는 전장에서 고통을 줄여주는 필수 약품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통 효과만큼 중독도 쉬워 전쟁이 끝난 후 모르핀 중독은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30년 전 시골 병원 응급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밤 11시 무렵 조용한 응급실 문을 열어젖히고 누군가 접수대로 걸어왔다. 또각또각 울리던 목발 소리. 고개 들어보니 한쪽 다리가 없는 상이군인이었다. 내가 근무하기 한참 전부터 몇 달에 한 번씩 와서 모르핀 놔 달라고 실랑이하는 단골 환자라 했다. 몇 년 뒤 잊고 있던 그분을 다시 만났다. 대학병원 소아과 레지던트로 응급실 당직 근무 중이었을 때다. 그분은 접수대에서 한참 요란스럽게 있다가 결국 모르핀을 맞고 병원을 떠났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모르핀을 맞는 분이야.”
차트를 덮으며 응급의학과 선생이 하던 얘기가 희미하게 기억났다. 뚝방길가에 피어있는 양귀비꽃을 보니 모르핀 중독으로 몇십 년을 떠돌아다녔던 그분이 생각났다. 같이 걷던 아내는 양귀비꽃이 영국에서 추모의 뜻으로 쓰인다고 했다. 잘 몰랐던 얘기라 궁금해서 찾아봤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11월 11일에 맞춰 11월 11일을 우리나라의 현충일 격인 리멤버런스 데이(Remembrance day)로 지정했다. 전몰장병의 희생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의미로 10월 하순부터 리멤버런스 데이까지 붉은 양귀비꽃을 가슴에 단다고 한다. 1915년 캐나다의 존 맥크레이 대령이 폐허가 된 전쟁터와 무덤에 피어난 붉은 양귀비꽃을 보고 시를 썼다. 유명해진 시 덕분에 양귀비꽃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군인의 희생을 기억하는 추모의 꽃이 되었다. 죽은 이를 애도하며 이 시를 적었던 맥크레이 대령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0개월 전인 1918년 1월 28일 영국 군 병원에서 폐렴과 뇌수막염으로 사망했다.
뚝방길가에 피어있던 붉은 꽃잎을 떠올렸다. 삼십 년 전 모르핀에 중독되어 전국을 떠돌던 참전군인이었던 그분의 낡은 목발 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피할 수 없는 전쟁의 고통을 죽어서야 끝낼 수 있었던 모든 참전군인에게 감사와 애도의 마음 담아 붉은 양귀비꽃 놓아드린다.
In Flanders fields the poppies blow
Between the crosses, row on row,
That mark our place; and in the sky
The larks, still bravely singing, fly
Scarce heard amid the guns below.
We are the dead. Short days ago
We lived, felt dawn, saw sunset glow,
Loved, and were loved, and now we lie
In Flanders fields.
Take up our quarrel with the foe:
To you from failing hands we throw
The torch; be yours to hold it high.
If ye break faith with us who die
We shall not sleep, though poppies grow
In Flanders fields
_ In Flanders fields, John McCrae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 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이네
그리고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아오르건만
저 밑에 요란한 총소리 있어 그 노래 잘 들리지는 않네
우리는 이제 유명을 달리한 자들
며칠 전만 해도 살아서 새벽을 느꼈고 석양을 바라보았네
사랑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건만
지금 우리는 플랑드르 들판에 이렇게 누워 있다네
원수들과 우리들의 싸움 포기하려는데
힘이 빠져나가는 내 손으로 그대 향해 던지는 이 횃불
그대 붙잡고 높이 들게나
우리와의 신의를 그대가 저버린다면
우리는 영영 잠들지 못하리
비록 플랑드르 들판에 양귀비꽃 자란다고 하여도.
_ 플랑드르 들판에서, 존 맥크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