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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Jun 28. 2024

버리지 못하는 마음

   자동차에 기름 넣는 주기가 왠지 짧아지는 기분이다. 차 트렁크를 열었다. 몇 년째 붙박이장처럼 자리 잡은 상자 두 개가 눈에 띄었다. 5년 전 마트에서 와인 살 때 공짜로 받은 나무 와인 상자다. 상자 안엔 십 년 동안 버리지 않고, 아니 못하고 있는 잡동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배드민턴 몇 년에 흔들리는 다리 잡아주던 무릎보호대 두어 개. 테니스 엘보로 고생할 때 버티게 해준 엘보우 서포트 몇 개. 사무실이나 집에서 환영받지 못해 자동차 트렁크를 집 삼아 웅크리고 있던 케이블들. 뒤적이다 버릴 것들은 70리터 쓰레기봉투로 보내고 보관해야 할 것은 자동차 바퀴 옆에 차곡차곡 쌓았다. 

   십 년 동안 환영받지 못하고 겉돌던 내 삶의 경계들. 아, 저게 또 있었네. 마음이 심란하던 그때 짊어지고 산을 올랐던 작은 배낭. 마지막 사용한 게 한 삼 년 되었지. 그래, 배낭아, 너는 다시 차 트렁크에서 좀 쉬고 있으렴. 또 뭐가 있으려나. 파란 클라이밍 신발과 초크가루 묻은 주머니가 보였다. 

   십 년 전 체육관 옆 암장에서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후들후들 흔들리는 다리며 까마득하게 보이는 지면을 이겨내고 정상에 올랐을 때 그 짜릿함이 떠올랐다. 하지만 초보자의 행운은 잠시. 실내 암장에서 손에 닿지 않는 홀더(등반할 때 잡거나 밟을 수 있는 돌 같은 것)를 겨우 잡고 위쪽 홀더로 이동하려고 힘준 순간, 양쪽 고막을 흔드는 ‘뚝’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어진 칼날 같은 통증.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이 퉁퉁 붓기 시작했다. 정형외과로 달렸다. X-선 사진을 본 정형외과 원장님은 나를 안타깝게 쳐다보셨다.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

   “이제, 나이를 생각하셔야죠.” 

   평소 잦은 부상으로 정형외과를 제집처럼 드나들던 나를 걱정해 주시는 말씀에 그냥 웃고 말았다. 그렇게 부러진 나의 네 번째 손가락 둘째 마디. 손가락을 깁스한 뒤 클라이밍 신발과 초크주머니는 여기저기 옮겨 다니다 차 트렁크에 자리 잡았다. 가지도 못할 암벽이지만 파란 암벽화는 늘 내 곁에 십 년을 붙어 있었다. 녀석도 답답했을 텐데. 암벽화가 든 신발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70리터 쓰레기봉투로 보내야 하나? 

   BC 268년부터 231년까지 인도 중부지방 마우리야 왕조의 세 번째 왕인 아육왕 이야기가 있다. 권세를 누리다 죽음이 임박한 그는 창고의 보물들을 모두 절에 보시하고 암라나무 열매 하나만 가지게 되었다. 죽기 전 마지막 남은 열매도 보시하고 곁에 있던 신하에게 물음을 하나 남긴다. '오늘 이 속세에서 가장 자유로운 자는 누구인가.' 권세와 재물을 가졌던 아육왕은 깨달음을 얻고 편안히 눈을 감았다는 내용이다. 

   종교의 심오함이나 아육왕이 깨달았던 것이 무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가 남긴 질문이 계속 귓전에 맴돌았다. 오늘 이 속세에서 가장 자유로운 자는 누구인가…. 사용하지도 않을 물건을 십 년째 차에 싣고 다녔던 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나는 어쩌면 내 팔이 닿는 경계 안에 갇혀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랬으면 또 어떤가. 이제는 갈 수 없는 유토피아가 되어버린 암벽 정상 대신, 그 시절을 꿈꾸며 잠시나마 고단한 일상의 도피처-헤테로토피아-가 되어주는 푸른 암벽화와 초크 주머니 하나에 웃음 짓는 그것만으로도 자유로운 순간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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