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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니보이 Aug 26. 2024

고종의 길

   덕수궁 돌담길을 걸었다. 이 길을 연인이 함께 걸으면 헤어지게 되고, 부부는 이혼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이 이야기는 어디서 유래했을까? 1928년 경성재판소가 덕수궁 옆에 세워졌고 이후 1995년까지 대법원 청사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서울시립미술관 자리다. 대법원이 있으니 고등법원도 있었고 가정법원도 있었다. 이후 1963년 10월 1일 서대문구 서소문동 57번지에 서울가정법원이 개원하였으며 1971년 9월에 서소문동 37, 38번지로 이전하여 서울고등법원과 같은 건물을 사용하게 되었다. 서소문동 가정법원에서 이혼하고 나오는 부부가 마지막으로 같이 걷는 길이 덕수궁 돌담길이다 보니 아름다운 그 길이 연인들에겐 피해야 할 징크스가 되었다. 지금이야 법원이 서초동으로 옮겼으니 그런 야사들이 힘을 잃었지만, 그때 누군가에는 장차 닥쳐올, 아니면 받아들여야 할 현실 속 좋은 핑곗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돌담길 옆 미술관 앞에 활짝 핀 장미꽃을 지나 미국 대사관저 옆길을 걸어 올랐다. 

   오르막 정점에는 ‘선대왕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인 선원전 안내판이 서 있었다. 1897년 4월에 완공하여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익종, 헌종의 어진을 봉안했으니 1896년 2월에 일어난 일을 선대왕들은 보지 못했을 것이다.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은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숨긴 채 경복궁 건춘문을 빠져나왔다. 가마는 덕수궁 돌담 바깥 영국대사관 출입로를 거쳐 현재 ‘고종의 길’로 이름 붙은 작은 길을 지나 정동공원 러시아공사관으로 들어갔다. 당시 러시아를 ‘아라사국(俄羅斯國)’으로 불렀기 때문에 이 일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라 한다.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며 정사를 돌보다 1년 8개월 뒤 경운궁으로 환궁했다. 

   새벽에 한 나라의 왕이 궁녀가 타는 가마에 몸을 싣고 서둘러 도망갔던 그 길, 그늘 하나 보이지 않는 길을 내리쬐는 햇빛을 맞으며 걸었다. 이 좁은 길, 좁은 문을 지나며 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어쩌면 왕은 이 길 끝에 살 방도가 있을 것이라 믿으며 수치를 이겨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선포,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외교권 박탈, 1907년 7월 20일 고종 퇴위, 1910년 8월 29일(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으로 나라를 잃게 된 과정을 보면 고종이 달려간 좁은 길 끝엔 당시 힘없는 나라의 결말이 그러했듯 나락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고종은 조선 중기 이후 열려버린 쇠락의 넓은 길 끄트머리쯤 좁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더운 길 따라 걷다 작은 공원에 섰다. 야트막한 동산 위 하얀 건물이 하나 보인다. 고종이 일 년 넘게 머물렀던 러시아공사관 흔적이었다. 작은 한숨 내어 뱉고 정동길 지나 덕수궁 돌담길을 걸어 내려왔다. 사방 연속무늬 같은 돌담들에 어지러운 시선을 돌렸더니 어느새 대한문.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을 준비하는 젊은이들이 보였다. 과거 언제 적 영광을 재현하는지 모를 그들의 얼굴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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