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에 지친 아이들 울음소리가 잠잠해 질 때쯤 무거운 청진기 내려놓고 집으로 향한다. 가방을 내려놓고 화장실에서 묵은 하루 때를 털어낸 뒤 냉장고로 달려간다. 버튼을 누르면 기쁜 소식 전해주는 작은 우편함처럼 냉장고는 훤히 속내를 보여준다. 유당에 민감한 식구 덕분에 자리 잡은 유당 없는 저지방 우유를 집어 든다. 커다란 컵에 가득 붓고서 냉동 칸에 쟁여둔다.
셔벗 같은 촉감에 고소한 맛이 일품인 우유를 맛본 뒤, 퇴근 후 우유를 얼리는 것이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내 입맛에 제일 좋은 살얼음의 강도가 두 시간 반에서 세 시간 뒤라 퇴근하자마자 냉동실에 우유를 넣어 두어야만 잊지 않고 자기 전에 먹을 수 있어서다. 저녁 먹고 가벼운 산책, 샤워를 마치고 책상에 앉아 살짝 언 우유를 포크 숟가락으로 살살 긁다 문득 희미한 기억 속 우유들이 떠 올랐다. 학교에서 맛본 듯한 전지분유. 유리병에든 우유를 마시려고 두꺼운 종이 마개를 손가락으로 꾹 눌러야 했던 순간. 폴리에틸렌 필름 용기에 담긴 커피포리우유에 바나나맛우유 등등. 마셔왔던 우유들의 추억은 요 며칠 동안 싹 다 희미해졌다. 두 시간 냉동 후 맛보는 살얼음 우유의 강렬하고도 고소한 그 맛에 비할 수 없었다.
최신효과(Recency effect) 때문일 수도 있다. 가장 나중에 얻게 된 정보가 가장 기억에 남는 현상으로 초두효과(Primary effect, 가장 먼저 제시된 정보가 기억에 중요하다는 뜻)와 더불어 사람의 기억력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론이다. 하지만 우유에 관한 한 초두효과보다는 최신효과만이 내게 존재한다. 오늘 맛본 사르르 우유만이 혀끝을 거쳐 온몸을 타고 내리는 짜릿함으로 고단한 하루를 씻어 내려준다. 물론 최신효과도 그 맛을 기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을 테지만, 오십 넘은 사람의 뇌세포가 성할 리 없으니 내 몸이 초두효과를 기억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아무렴 어떤가, 맛있으면 그만이지. 그런데 정말 우유를 얼렸다 먹으면 더 맛있을까?
우유는 물이 약 85% 정도 포함되어 있는데 0도 이하로 떨어지면 물 분자끼리 얼음 결정을 형성한다. 이때 유단백, 유지방 등 다른 영양성분도 분리된다. 그리고 유지방 유단백 성분은 물보다 녹는점이 높아 얼린 우유가 상온에서 녹기 시작하면 물을 뺀 나머지 영양성분들이 농축되어 우유의 풍미가 더 강해진다고 한다. 내가 느낀 달콤하고 짜릿한 우유의 맛은 한 치 오차 없는 과학의 맛 그 자체였다.
어제저녁, 과학과 조우하고 있던 중요한 순간 아내가 던진 한마디에 입안에서 녹고 있던 우유가 튀어나올 뻔했다.
“여보, 이제 우유 그만 마셔!”
“왜?”
“당신 얼굴이 하얘지고 고와져, 우유 때문인 것 같아. 안 되겠어.”
나이 든 남편 주름살 늘지 않는다고 농담처럼 타박하던 아내는 이제 얼굴 하얘진다고 삐죽해하고 있다. 정말 우유를 끊어야 할지 아니면 아내의 피부 관리를 위해 지갑을 열어야 하는 건지. 에라 모르겠다. 비록 내일 집 앞 마트가 문을 닫더라도 나는 오늘 한잔 우유를 마시고 잠자리에 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