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챗지피티
진료실을 들어서자마자 밭은기침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여섯 살 아이. 시뻘건 얼굴로 속에 들러붙은 가래를 뱉어내고서야 옅게 숨을 내쉬었다. 39도 오르내리는 열과 숨 쉴 새 없이 나오는 기침에 아이는 퀭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디가 아파서 왔니?” 이미 온몸으로 고통을 표현했지만, 확인을 위해 물었다. “yoc il loo di …”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옆에 있는 아이 엄마를 돌아보았다. 큰 키에 금발을 뒤로 묶은 아이 엄마는 스마트폰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었다. 그리고 스마트폰 화면을 내 앞에 내밀었다. 이틀 전부터 열나고 어제부터 기침이 심해졌는데 X-ray 사진을 찍어봐야 하냐는 내용이었다. 3층에서 X-ray 찍고 오시라고 영어로 천천히 말해주었다.
한 달 전인가? 서울 학회에서 좋아하는 선배를 만났다. 몇 시간 공부하고 함께 점심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강 선생 ChatGPT 사용해 봤어?” 몇 번 사용해 봤다고 말씀드렸더니 자신의 핸드폰에서 ChatGPT 앱을 열었다. “이 앱 사용해 보니 외국어 통역해 주던 직원, 계약 만료되면 재계약 안 해도 될 것 같아.” 병원에서 통역용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시연해 주셨다.
X-ray 사진 찍고 내려온 Alex를 앉혀놓고 아이 엄마에게 ChatGPT로 대화를 시도했다. X-ray 사진을 설명하고 상태가 나빠지면 입원이 필요하다고 얘기했다. 내가 말하는 한국어는 러시아말로, 보호자의 러시아말은 한국어로 천천히 통역하라는 나의 정중한 부탁에 ChatGPT는 의사소통에 문제없을 만큼 러시아말로 나의 얘기를 전했다. 별다른 시간 낭비 없이 진료를 마치고 러시아 소년은 “안녀히 게세요”란 서툰 인사를 남기고 돌아나갔다.
아이가 나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은 통역에 짧은 공백이 있으나 얼마 가지 않아 AI의 머뭇거림도 아주 짧아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선배가 얘기했던 단순 통역은 AI가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은? 아마도 파도치는 제4의 물결은 의료 분야도 예외 없이 몰려올 것이다. 그러면 의사는 어떻게 될까?
2023년 8월 흥미로운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연구진이 ChatGPT가 미국의료면허 시험을 통과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물론 시험을 통과했다고 당장 현실에서 책임 있는 의료행위를 AI가 대신할 수는 없다. 하지만 멀지 않은 앞날에 환자가 처음 만나는 의사는 아마도 병원 진료실 책상 위 AI 모니터일지도 모르겠다.
AI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 방법을 선택하여 추천하려면 크게 네 단계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첫 번째는 의료기록 작성 같은 단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언어모델이 필요하고 두 번째는 기계학습을 통해 임상 데이터를 적절하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 번째는 환자별 데이터에서 의미 있는 임상 정보를 추출할 수 있어야 하며 마지막으로 의사의 개입 없이 환자의 기록을 분석하고 진단 처방하는 완전한 AI 모델 의사가 되는 것이다. 신문 기사는 현재 개발 수준은 아직 의사를 대체할 수준은 아니지만 나중에는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로 끝냈다. 길지 않은 기사였지만 의사로서 살아갈 시간이 십수 년 남은 나로서는 어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지 약간은 혼란스러웠다.
우연인지 몰라도 얼마 전 이승원 작가의 ‘사라진 직업의 역사’가 떠올랐다. 조선 또는 구한말부터 존재하던 직업인 전화교환수, 변사, 기생, 전기수, 유모, 인력거꾼, 여차장, 물장수, 약장수의 흥망성쇠를 얘기하면서 작가는 ‘어떤 직업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직업에 대한 욕망이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욕망은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여 그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이 탄생한다.
2007년 1월 9일 스티브 잡스는 아이폰 첫 모델을 세상에 선보였다. 그날 이후 수십억 인류의 삶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되었다. 그 아이폰을 타고 수많은 욕망이 생겨나고 실현되어, 또 많은 이의 삶을 바꾸었을 것이다. 2022년 11월 프로토타입의 ChatGPT가 세상에 선보였다. 2년이 채 되지 않은 기간에 ChatGPT-AI는 아이폰보다 더 빠르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AI가 가져올 새로운 세상에 나는 어떤 직업인으로 남을 수 있을까? 어떤 새로운 욕망을 꿈꾸어야 할까? 러시아 소년이 던져 놓고 간 화두 하나 챙겨놓고 다음 환자를 부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