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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끝없는대화 Jul 25. 2020

내일 죽는다면 오늘 출근하시겠습니까?

"비록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_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이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된다. 미래나 결과가 어떻게 되던 자신의 소관이 아니니 자신의 할 일을 하겠다는 신념이기도 하고 대단한 것이 아닌 작은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운명에 순응하겠다는 대자연 앞의 작은 존재로서의 겸손으로도 보인다.


 지금까지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여러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을 만나겠다, 맛있는 것을 먹겠다, 출근 안 하고 흥청망청 있는 돈을 다 쓰며 놀겠다, 어떤 장소에 가겠다 등의 대답을 들었다. 애초에 정답이 없는 질문이니 대답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곧 진리이자 정답이다.


 오늘 무엇을 할 것이냐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상적인 질문에 내일 죽는다면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으면 왜 대답이 180도 달라질까? 영화를 좋아한다면 사실 인간과 삶의 가치는 무엇인가를 말하는 영화는 단연 SF영화라는 것에 많이 동의하실 것이다. 기계와 인공지능, 우주, 디스토피아, 미래사회, 외계 생물 등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들 투성이지만 그것들이 오히려 인간, 영혼, 지구, 일상, 자연, 현재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뛰다가 걸으면 서고 싶고, 서면 앉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인간이라, 살아있는 사람이 삶의 의미를 생각하려면 삶의 부재, 죽음을 상상해보는 방법밖에 없다. 사실 죽음이 두려운 큰 이유는 죽는 순간이나 죽은 다음이 아닌 죽기 전 삶에서 누렸던 것들이 중단되고 사라지는 것이다.


 동생이 죽고 오랫동안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죽음이 추상이 아닌 손에 잡힐 듯 뚜렷한 실체가 되어 나에게 다가왔고 사람은 쉽게 죽지 않지만 쉽게 죽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죽음은 모두에게 평등하고 필연적인 결말이고 그것이 언제일지는 신만이 아는 것이다.

 애도 기간이 어느 정도 흐르고 스스로 죽음에 걸어 들어가지 않더라도 나에게도 예기치 않은 순간에 죽음이 올 것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내 삶은 오늘 하루만 존재했다. 오늘 하고 싶은 것, 놀러 가고 싶은 곳이 생기면 그날 해야 했고 그날 숙소를 예약해서 떠났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바로 연락해서 약속을 잡았다. 하기 싫은 일은 최대한 하지 않았다. 며칠을 두고 바라보는 장기적인 계획은 세우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에 귀 기울이고 어디로 가고 싶어 하는지 경청하게 됐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저 내가 하고 싶어서, 라는 것이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었다. 삶의 의미나 목적 같은 것은 중요치 않았다. 길가에 핀 들꽃이 뿌리를 내리고 잎을 키우면서 내가 이 동네에서 짱이 되어야지 한다거나 무슨 의미를 생각하고 하겠는가, 그냥 그렇게 되는 거지. '자연(自然)'스럽게 몸과 마음이 흐르는 대로 살기로 했다. 내일이 없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 이유에 대한 나의 대답은 내일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건 상관없이 오로지 나의 마음이 원해서다.


 죽음 옆에 서보니 과거엔 중요했던 것들이 사실 별 의미가 없었다.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 노후 걱정도, 안정적인 직업도 원하지 않았다. 만약을 위해, 나중을 위해, 언젠가 쓸 때를 위해 가지고 있던 상당량의 옷과 화장품과 장식소품과 생활용품과 추억의 물건들과 책을 버렸다. 옷장도 텅텅 비어서 버렸다. 헹거 하나에 걸린 사계절 옷이 통틀어 약 40여 벌이 전부다. 물건뿐만 아니라 많은 일들에 좋아할 것도 싫어할 것도 없구나 하고 절간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동생을 보내주지 않고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도 괜찮겠다고 받아들였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에게 허락하는 것은 커다란 안도감을 주었다.

 마음은 별 노력 없이 비워졌으나 채우는 것이 어려웠다. 졸업한 디자인과 동기들은 취직을 했거나 취직 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니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하고 미래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자연스레 전공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오늘을 위한 것이 아닌 훗날을 바라보고 하는 일은 내 마음이 싫다고 아우성쳤다. 죽지 않고 살아있을 수도 있는 내일의 나를 위해서 삶의 방향성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오늘 사는 나에게는 도무지 필요성이 와닫지 않는 것이었다. 디자인이 싫지는 않았지만 옛날부터 모니터와 숫자 안에 담긴 것이 아닌 손으로 직접 만지고 계산 없이 하는 공예가 하고 싶었다. 수입과 장래가 불투명해서 포기하고 있었다. 욕심이 없으니 죽기 전까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가까운 도예 공방 수업을 등록할 예정이다. 오늘 하고 싶은 것을 아는 것은 쉬웠으나 오래도록 하고 싶은 것을 아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우선 글을 쓰는 것을 원하고 있다.


 내일이 없고 보상 같은 주말이 오지 않고 월급이 들어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면 당장 하고 있는 일, 예를 들면 집안일이나 불편한 자리에 나가거나 출근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다. 오늘이 다시 오지 않는데 이 귀한 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되나 싶다. 만 명에게는 만 개의 사정이 있고 만 개의 진리가 있으니 함부로 의견을 말하기 조심스럽다. 하나 조심스럽게 작은 제안을 해본다. 나는 약속과 해야 할 일들은 반드시 지키고 해야 하는 사람이었는데, 언젠가 내가 가기 싫다는 이유 하나로 약속을 취소하고 가지 않자 엄청나게 짜릿했다. 내 마음이 모든 것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1순위로 올라선 순간이었다. 아무리 지금 중요하고 필요해 보이는 것도 생각보다 그렇게 크게 우리 삶을 지배하지 않는다. 옷과 물건을 엄청나게 버렸는데 필요해서 후회하고 찾은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싫지만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은 싫은 마음을 내려놓았다. 일희일비하지 않으니 살기 편해졌다. 편하게 사는 것은 마음이 여유롭다는 것이고 곧 마음이 원하는 것을 말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니 일단 우리, 편하게 살자. 늘어진 고양이처럼 우리 꼭 편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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