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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끝없는대화 Jun 03. 2021

퇴사 일기

9개월간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살려고 퇴사했다.

삶에 위협을 느낀다면 우리는 무조건 도망쳐야 한다.


학창 시절 누구나 매슬로의 욕구 이론 5단계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1. 생리적 욕구

2. 안전 욕구

3. 애정/소속 욕구

4. 존경 욕구

5. 자아실현 욕구


일반적으로 낮은 단계가 충족되면 그 뒤 높은 단계까지 차례대로 욕구를 채우게 된다.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는 먹고살만하다고 느낀다면 누구나 가지게 된다. 사람들은 과거부터 집단을 이루어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학습을 해왔고, 현대에 이르러서 그것을 충족시키는 가장 쉬운 방법이 바로 공동체(학교, 회사)에 소속되는 것이다. 소속 욕구와 인정 욕구는 누구에게나 큰 부분을 차지한다.


현재 나는 8개월을 다녔고, 이번 달까지만 다니고 회사에 퇴사하겠노라 얘기한 뒤 <퇴사 대책>을 세우며 살고 있다. 나의 인내심을 믿으며 버틸만하다고 지내다가 어느 순간 두통과 위경련이 찾아왔다. 마음을 넘어서 신체가 나의 회사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신체적, 심리적) 안전 욕구가 소속 욕구를 뚫고 나온 순간이었다. 정말 그만둬야 할 때였다. 실업급여도, 퇴직금도 탐나지 않았으며(아쉽지 않다고는 못하겠다) 월급이 찍힌 계좌를 봐도 기쁘지 않았다. 회사에서는 놀랐고, 붙잡으려 했으나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러 그만둔다고, 목공예가 운명의 만남이기 때문이라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반쯤은 술술 거짓말했다.

 퇴사를 예정하고, 내 살길을 찾아야 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공간에 있고 시키는 일만 하면 매달 고정적인 수입이 들어오는 회사의 품을 곧 떠난다. 쉴 새 없이 물장구를 치지 않으면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다.



 화장품 회사인 현재 회사에 첫 입사했다. 가족들에게 한정식집에 가서 식사를 대접하고, 부모님에게 자식이 이만큼 커서 제 밥벌이를 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안심시켜드렸다. 동생이 떠난 뒤 하나남은 자식은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살라 풀어주셨지만 그래도 남들처럼 일반적인 삶을 사는 것이 더 마음이 놓이셨을 것이다.

 내 취직은 나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언가가 지나가길 바라며 죽이는 시간'과의 고별인 동시에 '짜증과 소소한 기쁨이 담긴 반복적인 일상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 하는 다짐이었다.

 왜 퇴사하냐고 묻는다면 명확히 대답할 수 없다. 표면적으로 업무는 적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시켰으며, 옷이나 화장에 터치도 없었다. 법적으로 정해진 것은 다 지켜졌으며 많지 않은 월급은 단 하루도 밀린 적이 없었다. 디자인도 어느 정도 실력이 늘고 나서 인정받았다. 야근은 딱 한 번 해봤다.

 그러나 항상 이 공간이 숨이 막혔다. 사회초년생들은 당연히 사회생활이 낯설고 힘들겠지만 난 8개월이 지나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회사생활은 나와 안 맞는다는 생각이 확고해졌다. 내 일거수일투족이 보이지 않는 밧줄로 제약이 걸린 기분이었고 편도 1시간 40분의 출퇴근은 항상 힘들었다. 사무실엔 계속 누군가가 들락날락거렸고 불편했다. 4일 동안 일이 없다가 하루 동안 미친 듯이 바쁜 식으로 일정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고, 일이 없으면 별것 아닌 것을 계속 디벨롭을 시키거나 투명인간처럼 아예 방치시켰다. 업무체계는 엉망진창이며 닥친 일들을 막아내기에 급급했고, 사수는 평상시에는 좋은 사람이었지만 갑자기 급발진하며 전조증상 없이 화를 냈다. 화를 내는 사람의 일반적인 단계를 전혀 거치지 않았다. 나는 점점 말을 거는 것이 두려웠고 컨펌받으려면 마음의 준비를 충분히 해야만 말을 걸 수 있었다. 눈도 마주치기 싫었다. 조용히 서로 각자의 업무만 하고 휴식시간 외에는 잡담도 하기 힘든 삭막한 분위기에 디자인 파트는 외떨어진 무인도처럼 업무 대화에 소외되어 끝없이 일하는 척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가만히 있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보거나, 하거나, 새로운 것을 배워야 하는 성격상 이 하루 8시간은 블랙홀같이 평일 저녁과 주말을 제외하면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 시간 같았다. 일이 없는 시간에 자기 계발을 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웹서핑만 하도 많이 해서 네이버 메인 페이지의 모든 포스트를 다 읽어볼 정도였다. 3월에 이사를 해서 출퇴근 시간이 더욱 늘어났고, 욕심을 부려 일 년짜리 전통 목공예 (토요일 오전 9~12시) 수업을 등록한 것도 문제였다. 체력을 더욱 갉아먹고 마음의 부담이 되었다. 자꾸 결석했다.


 회사생활에서 의미도 보람도 없던 내가 퇴사를 미룬 이유는 그만두고 하고 싶은 일도 없었고, 회사를 핑계로 운동을 못한다, 자기 계발을 못한다, 시간이 없다 등등의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퇴사한 뒤 갑자기 생기는 12시간을 그리 알차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다면 남는 것은 모아둔 돈을 쓰는 내리막길밖에 없다는 것도 무서웠다. 남들 다 참으면서 다니는 직장, 내가 뭐가 모자라서 못 다닐까 싶었다.

 가장 큰 이유는, 동생에게 사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 권태롭고 반복적인 일상에서도 충분히 삶의 의미와 기쁨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말해줄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생각해? 썩 나쁘지 않았지? 한 번도 안 해봤다면 분명 후회했을 거야.


 인생의 PLAN B(퇴사 대책)를 적어보았다.

창업/ 주식/ 프리랜서 디자이너 / 유튜버 / 배민 라이더 / 프리터족


 창업을 하고 홍보를 하려면 필수로 인스타, 블로그, 유튜브까지 해야 한다는데...

단 하나도 해본 게 없다. 난 사업의 사 자도 모르고, 주식은 매도/ 매수밖에 모른다. 한 마디로 남들 다 하는 재테크, 온라인 소통에는 관심이 전혀 없는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라는 소리다. 팔자에도 없던 구독 좋아요 알림 설정 부탁드려요! 를 외치게 될 것 같다. 블로그, 인스타, 유튜브 모두 계정만 있는 댓글조차 달아보지 않은 눈팅족이며 관종 끼는커녕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으면 좋겠다....(물론 노력해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참 크다)


 노트에 내가 가진 장점들과 단점, 바꿀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없는 것들을 적어보았다.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도전하는 데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점이다. 학구열은 나름 있는 편이다. 새로운 게 가장 재밌다.

단점은, 끗발이 안 좋다. 한번 빠져들면 미친 듯이 그것만 하다가 지쳐서 쉽게 질린다. 취미는, 오래 해서 높은 경지까지 오르는 것보다 시작해서 도구의 종류와 기법, 용어들을 찾는 것이 가장 재밌다! 게임도 초반 쪼렙 때가 가장 재밌다. 어느 정도 동의하실 것이다.


 우선 바꿀 수 없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에너지 효율이 높다. 사람과 같이 있으면 에너지가 점점 줄어든다. 그래서 퇴사하고 혼자 일하면 더 큰 아웃풋이 나올 수도 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내가 활용할 수 있는 시간과 체력. 퇴사 후에도 규칙적인 수면 패턴, 데일리 루틴, 운동습관으로 베이스를 다져놓으려고 한다. 나는 우울증 이력이 있기 때문에 평생 케어하며 살아야 하는데, 하루의 컨디션이 기분을 좌우하는 것이 상당히 컸다.


 사실 잘 모르겠다. 잘 안될 가능성이 크다. 1년 안에 아무것도 안 되면 다시 취직하려고 한다. 그래도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빨리 실패해야 현실을 직시하고 월급쟁이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쉬울 것 같다. 모르는 것도 너무 많고 해야 할 것도 많고, 할 수 있는 것이 뭔지도 모르겠다. 퇴사 뒤 창업을 하려고 하니 퇴로를 막아놓고 야생으로 뛰어드는 기분이 든다.

하나하나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겠다. 무언가라도 계속 배우고 움직이는 것이 불안함을 줄이는 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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