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미 Nov 23. 2022

현실이 환상을 이길 순 없지

에세이 연습 과제 18 - 친구와의 대화를 기억해 대사에 집중하기


어느 늦은 저녁,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늘 그렇듯 수화기 너머에서 자신의 고민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누나, 전화 가능해요?”

“응. 무슨 일이야?”

“아...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누나 잘 지내나 해서요.”

“웃기지 마. 너는 항상 무슨 일이 있어야 전화하잖아.”

“티나요?”

“응. 엄청. 뭔데? 또 애인이랑 깨졌니?”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아, 근데... 깨진 것 까진 아니고 거의 그런 상태.”

“직장 있고, 가족 건강한 서른 살 남자 인생에 연애, 결혼 말고 무슨 큰일이 있겠어? 왜 싸웠는데?”

“아... 너무 안 맞아서요.”

“뭐가 안 맞아?”

“그냥... 성격이 둘 다 너무 불같고, 그러다 보니 싸움이 끊이질 않고, 한 번 싸우면 관계가 개판이 되니까 많이 힘들더라고요. 결혼까지 생각했던 사람인데, 이렇게 안 맞는 걸 보니 자괴감도 많이 들었고요.”

“사람이 서로 사귀다 보면 안 맞을 수도 있지, 무슨 자괴감까지 느끼고 그러니...”

“결혼하려고 마음먹었던 사람이랑 잘 안되니까 마음이 좀 그렇네요.”

“결혼까지 생각했다면 신중하게 고른 여자였을 텐데?”

“그랬죠...”

“그럼, 그때는 그 여자랑 잘 맞다고 생각해서 사귄 걸 거 아니야.”

“맞춰 갈 수 있을 줄 알았죠.”

“안 맞는 부분이 있었는데 맞춰 갈 수 있을 줄 알아서 사귄 거라고? 그다지 신중해 보이지 않는데?”

“외모가 정말 제 이상형이었거든요.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고, 귀여웠어요.”

“그럼, 성격이 좀 안 맞아도 단발머리에 귀여운 얼굴 뜯어보면서 살아야지.”

“에이, 그래도 그게 아니죠. 결혼하면 평생 같이 살 사람이니, 일단 성격이 잘 맞아야죠.”

“성격을 보고 고른 상대가 아닌데 성격까지 잘 맞기를 바라는 건, 네 욕심이지.”

“정말 그럴까요?”

“성격이 안 맞을 걸 알고 사귀었다며? 외모가 네 이상형이어서... 그래서 외모에 만족했으면 성격 모난 건 좀 봐줘야 인간적이지 않겠니?”

“하... 그래도 너무 안 맞아서...”

“네 결혼 상대로서 성격에 그 정도로 하자가 있다면 헤어지고 다른 여자를 만나면 되잖아.”

“그것도 말이 쉽죠.”

“말이 쉬운 게 아니지, 네 욕심이 어마무시 한 거지. 막상 헤어지려니 아쉬운 거 아니야. 외모는 마음에 드니까.”

“에이, 그래도 결혼 상대는 얼굴보단 성격을 먼저 봐야죠.”

“그렇게 생각하면, 헤어지고 성격 좋은 다른 여자를 찾아보라니까?”

“...”

“네가 이제껏 사귄 여자들, 내가 다 알잖아. 너 엑스 중에 성격 좋은 애들 많았어. 너도 걔들이랑 사귈 때, 결혼하기에 좋은 성격인 것 같아서 사귄다고 그랬다고. 근데 그런 애들이랑도 다 헤어져 놓고, 이젠 결혼하기엔 성격이 별로라서 헤어진다고? 그럼,  아무도 못 만나는 거지, 뭐.”

“외모도 제 이상형이고 성격도 잘 맞는 사람, 어디 없을까요?”

“있었니?”

“네?”

“그런 여자가 여태껏 있었냐고. 있었으면 그렇게 결혼, 결혼 노래를 부르는 넌데 진작 사귀어서 결혼했겠지.”

“그러네요... 그럼 저는 누굴 만나야 될까요?”

“내가 보기에 너는 너에게 성숙한 관계를 가르쳐 줄 수 있는... 뭐랄까... 스승 같은 사람을 만나야 될 거 같아.”

“제가 좀 애 같긴 하죠. 다혈질에...”

“응. 앞으론 좀 덜 애 같고, 다혈질이 아닌 사람을 만나.”

“그런 사람을 어디서 만나죠?”

“소개팅.”

“소개팅으로 만날 수 있을까요?”

“아님, 결혼 정보회사에 가입해. 거기서는 비싼 플랜에 가입하면 원하는 조건 다 맞춰 준다더라. 한 칠백만 원짜리...”

“돈 없어요...”

“그럼, 혼자 살아야지 뭘, 어떡하겠니...”

“에휴... 진짜 이런 여자는 없을까요? 작은 키에 생머리에 단발이 잘 어울리는 아담한 여자, 피부도 좋고 웃을 때 귀염상인, 거기다가 성격도 차분하고 현명한 여자 말이에요.”

“응, 없어.”

“단호하시네요. 단호박인 줄.”

“네가 아직 환상 속에 사니까. 현실이 환상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지.”

“제가 그렇게 비현실적이에요?”

“At the moment, YES! 네 주변을 둘러봐. 그게 현실이야. 그 속에 없으면 없는 거지.”

“에휴... 욕심을 버려야겠네요.”

“욕심을 버리든, 계속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아보든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 하고 싶은 건 다 해보고 죽어. 그럼 후회는 안 남을 거 아냐. 그럼 된 거지.”

“누나도 얼른 결혼하셔야죠?”

“뭐 하러, 지금이 편하고 좋은데.”

“그래도요...”

“아, 난 귀찮아. 너나 열심히 준비해, 결혼. 네 결혼식은 갈 테니.”

“당연히 오셔야죠! 우리 우정이 몇 년인데.”

“응, 그래 꼭 갈게.”

“누나는... 아직 없어요?”

“뭐가 없어?”

“남자요.”

“애인?”

“네.”

“응.”

“왜요? 이제 사귈 때 되셨잖아요.”

“그게 마음대로 되니. 마음에 드는 이성이 없네.”

“누나... 혹시... 아, 아니에요.”

“뭐! 왜! 왜 말을 하다 말아? 궁금해!”

“혹시 여자 좋아하시는 건 아니죠?”

“모르지.”

“네? 여자 좋아하세요?”

“몰라. 여자는 애인으로 아직 한 번도 안 사귀어봤지만, 또 모르지. 한소희 같은 여자가 눈앞에 나타난다면 장담 못해. 같은 여자가 봐도 한소희는 진짜 예쁘고 멋있더라.”

“헐...”

“헐은 무슨... 쓸데없는 말 할 거면 끊어.”

“아잉, 누나.”

“어휴... 지금 몹시 징그럽다. 끊을게.”


나는 별안간 전화를 끊었다. MBTI 성격유형 INTP에다가 DINK이자 법률혼 반대자에 해당하는 나에게 매번 비슷한 맥락으로 사랑과 연애에 대한 조언을 구하다니, 확실히 별난 구석이 있는 그였다. 그가 징그럽게 굴지만 않았어도 이 말을 마지막으로 통화를 끝냈을 것이다. 어쨌든 만남도 이별도 모두 물 흐르듯, 바람 불 듯 오가게 두는 것이 좋겠다고... 흐르는 물, 부는 바람을 어찌 사람 손으로 쥘 수 있겠는가 이 말이다. 어차피 인력으로 어찌하지 못할 인연이라면 자연히 오고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인간 정신에 좋지 않을까? 그러다 내 손에 닿는 남의 손이 있으면, 그때 한 번 꽉 맞잡아 봐도 될 일이니.


그와 대화를 나누는 내내 한편으로는 그의 열정이 부럽기도 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이 원하는 사랑을 갈구하고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려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대인기피 증세를 동반한 무기력증과 귀차니즘에 사로잡힌 나로서는 그의 넘치는 에너지가 남부럽기 그지없었다. 앞으로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고 이별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이 가진 환상 값과 기대치를 현실에 맞게 적절히 조율함으로 한층 수더분한 그가 되길 바라본다.



작가의 이전글 나도 잘 키우고 싶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