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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17. 2016

추석 이야기


1.

할 일이 많은데 피하고 싶으면 다른 일을 만들어 도망가는 버릇은 올해도 고치지 못하였다. 덕분에 하루 전에 몰아서 전 부치고 나물 무치고 탕 준비하는 일을 해내야 했는데 막상 해보니 할 만하다고 여겨져서 다음부터는 하루만 일해도 되겠구나 생각하다가 아차 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송편과 나박김치를 엄마에게서 얻어온 건 과외로 치더라도 이번 추석은 갈비찜도 생략하고 식혜도 없이 지낸 차례라는 걸 깜박했기 때문이다. 남들 하는 음식의 가짓수와 양에 비하면 정말 우스울 만큼 적은 일거리 가지고 엄살떠는 것, 이제 그만하기로 마음먹었다.



2. 
부엌에서 전 부치다가 창밖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어느새 주목에 빨간 열매가 다닥다닥 열려 있었다. 날은 아직 더운데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를 보는 것처럼 반갑고 행복해서 음식 준비하고 설거지하면서도 틈만 나면 나가서 올려다보고 감탄하고 사진도 찍었다. 일하면서 한 눈 팔기 선수라 라디오 틀어놓고 책 늘어놓기 일쑤인데 올 추석은 주방 창가에 이렇게 어여쁘고 든든한 친구가 있어서 일하기가 한결 수월했다고 고백한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아담한 나무였는데 이제는 키도 크고 우람해져서 사다리가 없으면 꼭대기에 닿을 수도 없을 만큼 자랐다. 잘 다듬어주지 못해서 그리 매끈한 형태도 아니고 주방 앞을 너무 가리는 것 같아 어쩔까 했더니 이렇게 붉은 열매로 내 마음을 한 번에 돌려놓는 나무 한 그루.

3. 
차례상에 놓을 사과를 고를 때부터 타르트타탱이 굽고 싶었다. 달콤한 것이 필요했으면 케이크 한 조각을 사면 될 일이었다. 아무리 일이 적다고 했도 명절 끝이라 아직은 피로감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먹자마자 사과부터 깎았다.



사과 600그램에 버터 25그램을 넣어 녹인다. 설탕 120그램을 몇 번에 나누어 넣으면서 섞으면 설탕이 녹으면서 사과에서 수분이 나와 보글보글 기포가 생기기 시작하는데 이때 유산지를 냄비 크기에 맞추어 잘라서 사과 위에 얹고 약불에 10분 동안 익힌다. 10분이 지나면 럼주 1 큰술과 시나몬 파우더 1~2푼을 넣고 뒤적인 다음 다시 유산지를 얹고 약불에 15분을 놓아둔다. 럼을 넣을 때마다 병뚜껑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곤 하는 이유는 와인과 달리 럼을 넣은 케이크나 음식이 풍미도 달콤함도 진하다고 여겨서인데 병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농후한 향기는 아찔하고 자극적이라 생각이고 뭐고 한순간에 날아가 버리고 말아 그 생각은 거기서 항상 끝이 나버리고 만다. 끝까지 가지 못하는 이유가 향기 때문이라니 참 시시한 사람이다. 내가 아마추어인 또 하나의 표시는 시나몬 파우더의 양이다. 적당량이라고 되어 있으면 마음껏, 1~2 스푼이라고 적혀 있으면 2 스푼을 넣고 조금 더 뿌린다. 시나몬에 관한 한 레시피에서 알려주는 양은 내게 별 의미가 없어 내 마음대로 양껏 뿌려대는데도 나중에 먹거나 마실 때 거부감이 들지 않으니 이 또한 고마운 일이다.



15분이 지난 후에 유산지를 걷어내고 불을 세게 한 후에 수분을 날리는데 사과가 부서지지 않게 조심해서 뒤적거리다가 소스가 끈끈해질 정도가 되고 수분이 거의 졸아들면 불을 끈다. 본래는 파이 접시에 사과를 옮기고 파이 반죽을 얹어 굽는 것이지만 난 사과를 조린 냄비 위에 바로 반죽을 얹었다. 결과는 만족.



250도로 미리 예열한 오븐에 15분에서 20분 정도 구워내서 냄비 위에 접시를 얹고 뒤집으면 된다. 오렌지 케이크나 오늘 만든 타르트타탱 같은 업다운 케이크는 굽고 난 후 접시를 얹고 뒤집을 때마다 심호흡을 하게 된다. 한 번에 제대로 뒤집어야 깔끔한 모양이 나오기 때문인데 오늘도 역시 사과 조각 하나가 미끄러져 냄비에 남았다. 집게로 집어서 빠진 자리에 올려놓고 모른 척한다.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줄리아 아줌마가 잔소리를 하시겠군.



반듯한 케이크도 아니고 고운 색도 아니지만 한 조각 잘라 입에 넣는 순간 반해버렸다. 여태까지 구웠던 타르트타탱 중 최고다. 커다란 찻주전자를 옆에 놓고 식구들과 앉은자리에서 한 판을 다 해치웠다.
지금 생각해도 아쉽고 아쉽다. 내가 홍옥이 나오는 철을 기다리는 이유. 

4.
머루를 땄다. 혹은 머루 포도를 땄다. 몇 년 사이를 두고 머루를 심고 나란히 머루 포도를 심었다. 줄기가 올라가면서 얽혀서 어느 가지가 누구의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이파리 모양도 열매의 모양도 비슷하니 구분할 도리가 없지만 구태여 구분할 필요가 없으니 그게 그거다.



작은 소쿠리 하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커다란 광주리가 뒤이어 나갔다. 오늘 안에 마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서 일단 멈추었다. 알알이 따서 씻어 바구니에 담아 물기를 빼는 것까지 온전히 남편의 노동으로 이루어졌다. 우선은 보자기를 덮어서 김치냉장고에 넣어뒀다. 아마도 일부는 주스로 마실 거고 나머지는 잼이 되겠지. 이만하면 풍요로운 가을이다.

5.
추석 장의 마지막 코스는 서점이었다. 표지가 예쁜 책이 눈에 들어와 살펴보니 몇 년 전에 인상 깊게 읽었던 '백화점'의 작가 조경란의 소설집이라 집어 들었다. 어쩐지 모자랄 것 같아서 한 권 더, 이병률의 '안으로 멀리뛰기'다. 
일이 많으면, 특히 언제까지 꼭 해내야 할 일이 있을 때 평소보다 책을 더 읽는다. 일감을 쌓아놓고 쫓기듯이 책장을 넘기는 이유가 뭔지 가끔 생각해보지만 외면하기 이외의 다른 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겁 많고 비겁한 아줌마가 바로 나다.



'여우와 별'은 추석 전전날 밤, 그리고 추석 전 날 아침, 일 시작하기 전에 읽었다. 

이솝의 여우는 귀엽고
생텍쥐페리의 여우는 어른 같다.
올 추석에 만난 여우는 마치 나 같아서 몸이 떨렸다.


'후후후의 숲'은 백설공주가 사랑했던 난쟁이를 찾아가는 시녀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토끼로 변한 아버지, 여우가 두루미와 친구가 된 사연, 그리고 우리 주변의 정답고 외로운 이웃들의 모습에 은퇴한 배트맨의 이야기까지다. '백화점'을 읽을 때 그녀의 다른 책들을 찾아 읽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정말 마음뿐이었다. 언젠가 '인숙 만필'을 읽을 때 다시 조경란이란 이름이 떠올랐던 적이 있었지만 그때도 읽지는 못 했다. 짧은 이야기들에 사랑스러운 그림들이 중간중간 끼어 있고 그다지 슬프지도 절망스럽지도 않은 이야기들임에도 절로 눈물이 나서 자주 멈추어야 했던 책. 이제 그녀의 다른 책들을 찾아 읽기를 더 이상 미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 육수 내고 나물 데칠 물 끓이는 사이사이에 짧은 이야기들을 하나씩 읽었다.


우리 집은 수도가 연결되지 않았다. 대신 지하수를 마시고 그 물로 빨래를 한다. 물을 모아서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 그 정확한 시스템은 알 길이 없지만 아마도 남은 물은 어딘가에 모이는 것 같다. 물이 고여서 넘칠 정도가 되면 한 번에 물을 쏟아내는 소리가 들리는데 날이 저물어 사위가 고요해지면 물 쏟아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리곤 한다. 이 책, '안으로 멀리 뛰기'가 바로 그랬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가슴에 기쁨이 차오르고 슬픔도 차오르고 기대도 희망도 설렘도 차오른다. 고인 감정들이 찰랑찰랑 넘칠만하면 나가서 마당을 거닐거나 뿔을 뽑으면서 가슴을 비워내기를 여러 번 하면서 책을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앞으로 남은 날들이 얼마나 아름다울까 생각하다가 그만 아찔해졌다. 추석 전날 밤, 음식 준비가 다 끝난 후부터 읽기 시작해서 차례 지내고 뒷설거지하던 어제, 종일 책을 덮었다 열었다 하면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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