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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06. 2016

부엌 이야기 - 단호박 수프

엄마가 보낸 단호박은 세탁기 위에 오랫동안 놓여있었다. 빨래를 안 하는 날은 거의 없으니 나는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바구니에 담긴 단호박들을 본 셈이다. 단호박을 볼 때마다 하지 못한 숙제를 보는 기분이어서 보고도 못 본척하거나, 단호박은 놔둘수록 숙성이 되어서 맛있다니까 나중에 먹어도 된다고 중얼거리곤 했는데 어제 오후부터 그 단호박들이 계속 눈앞에 아른거리는 거다. 오늘 아침 눈을 뜨자마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도 단호박!


부엌에 서면 순간 생각이 많아진다. 마늘을 까거나 감자껍질을 벗기는 것처럼 손에 익은 작업을 할 때는 더 그렇다. 손 따로 머리 따로다. 신기한 건 마늘 껍질을 벗겨내기 시작할 때 머리에 꽉 차 있던 엉켜버린 실타래 같은 생각의 파편들이 껍질을 모두 벗어버린 마늘을 맑은 물에 헹굴 즈음이면 오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점이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한다거나 새로운 무언가를 계획한다는 등 손에 잡히는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디론가 증발해버린다. 우리의 머리를 분주하고 소란하게 만드는 생각의 대부분이 꼭 해결해야 한다거나 정리될 수 있는 성격의 것들이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자욱했던 아침 안개가 해가 떠오르면서 사라지듯이 형체도 그림자도 없이 그저 사라져버리는 게 최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작아서 껍질을 벗기기도 어려운 단호박을 왜 이렇게 많이 사셨을까? 단호박은 껍질도 좋다는데 나는 왜 껍질을 벗기느라 애를 쓰며, 간단하게 찌거나 굽거나 그도 아니면 조림 같은 걸 할 일이지 수프를 만든다고 이 더운 날에 땀을 흘리며 불앞에 서 있는 걸까? 어제 내가 산 양파는 껍질이 물러서 벗겨내다 보니 크기가 반으로 줄었다. 단호박 600그램에 양파 하나면 되는데 두 개는 써야겠군.



버터 한 스푼을 냄비에 넣고 녹으면 양파를 볶는다. 양파를 볶아서 시작하는 음식이 참 많기도 하지만 하나같이 말하는 건 양파는 가능하면 오랫동안, 타지 않게, 투명한 갈색이 될 때까지 볶아야 맛있다는 것이다. 눈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하얗지만 기름이 돌아 투명한 기색이 보이기 시작하면 성격 급한 나의 눈에는 하얀 양파가 어느새 노릇한 갈색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우유 2 컵에 생크림 1 컵, 물 1 컵의 비율이지만 오늘은 생크림이 없으니 우유 2컵 반, 물 1 컵 반이다. 뭉근한 불에 끓여서 호박이 부드럽게 부서지면 블랜더로 갈고 소금 간을 하면 호박 수프 완성이다.



껍질을 벗겨낸 단호박을 저울에 달아보니 900그램이 넘었다. 600그램만 수프를 끓이고 나머지는 감자와 함께 쪄서 샐러드를 만들었다. 건포도나 크랜베리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도 없으니 호두와 잣을 볶아서 넣었다. 오이를 얇게 썰어서 함께 넣고 요구르트와 마요네즈, 씨겨자, 화이트 와인 식초와 설탕 약간을 섞어 만든 드레싱에 버무려서 샐러드 완성이다. 만들어 놓고 보니 노란색에 연둣빛 오이만 보이는 게 마음에 안 찬다. 말린 과일과 찻잎이 섞인 허브티를 한 꼬집 샐러드 위에 올려놓고 좋아한다. 나는 비록 아침 세수도 안 하고 부엌에서 땀을 흘리지만 샐러드는 화장까지 시켜줬다.



어느 책에선가 봤다. 미국 여성의 절반가량이 욕실을 가장 완벽한 휴식공간이라고 했단다. 욕실은 시끄러운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모두 닫고 복잡한 일상의 요구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완벽한 휴식공간의 정의가 그렇다면 내게 부엌은 노동의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또한 휴식의 장소다. 부엌이 욕실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자신에게서도 도망칠 수 있다는 점이다. 계속 이어지는 동작과 일련의 과정들을 좇다 보면 자기 자신도 잊고 무아지경이 되어버리는 공간이 부엌이다. 욕실에서는 내가 너무 크게 보인다. 게다가 거울까지 있으니 도망갈 수도 없고. 물론 욕실에서는 물을 틀어놓고 중얼거릴 수도 있고 세수하는 척하면서 슬쩍 눈물을 흘릴 수 있기는 하다.



수프 끓인 김에 요구르트를 넣은 스콘도 함께 구웠다. 어릴 때 만두를 빚거나 송편을 만드는 날에는 어른 들 옆에 앉아서 반죽을 가지고 놀았다. 떡 반죽을 가지고 놀다가 동물이나 꽃 모양을 만들면 송편을 찔 때 함께 쪄주기도 했었다. 스콘 반죽을 밀어서 커터로 찍어내다 보면 항상 제일 마지막의 하나는 찍기 않고 손으로 다듬어서 굽곤 하는데 오늘은 그 대신 하트다. 내 어린 날 송편 만들던 어느 가을날을 불러내기 위한 소품.



단호박 수프, 단호박과 감자 샐러드, 요구르트를 넣은 스콘, 블루베리 잼과 청포도 잼으로 차린 마당의 점심 식사.



나는 부엌에서, 꽃들은 마당에서 오늘 하루도 참 잘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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