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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추꽃 별마당

by 라문숙



푸르스름한 초저녁 마당에 나가면 별이 가득이다. 작고 하얀 꽃잎 여섯 개가 만든 오종종한 꽃들이 별처럼 보인다. 부추꽃이다. 무수한 꽃들, 아니 별들이 모여 별무리를 만들었다. 부추 한 포기에 별무리가 하나씩이니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땅에서 생겨나는 셈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아도 별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늦여름 농염한 오후 햇살이 스러진 마당 이곳저곳에 하얀 부추꽃 무리가 보인다. 별무리들이 모여있으니 바로 작은 성단(星團)이다. 성단이 흩어져 있는 마당이라니 우주(宇宙)가 바로 이곳이다.


마당에 부추를 심은 건 오래전이다. 이사 와서 첫 봄이었을까. 마당에 뭘 심어야 좋을지 몰라 농원에서 불러주는 이름을 그대로 받아 부르며 모판에 담았던 모종들 사이에 부추도 있었다. 한 번 심으면 해마다 불어난다며 몇 포기만 심어놓으라고 하던 말이 과연 맞는 말일까 기대반 의심반하며 부추싹을 기다렸다. 등에 내려앉는 햇살에 몸이 노곤해지면 아지랑이가 피었고 그 너머로 돋아나던 부추싹이 아른했다. 기어이 부추 향기에 코가 매워서 맴을 돌던 봄은 몸을 푸는 여인과도 같았다. 봄이 몸을 한 번 뒤챌 때마다 제비꽃이 피고 산마늘 잎이 펼쳐졌다. 마당 귀퉁이에 빼곡하게 심어둔 갖가지 채소들 중에서 제일 오래가는 건 부추였다. 장마가 시작되면 상추는 끝이고 장마가 끝날 무렵이면 오이 맛이 덜했다. 매미 소리가 잦아들면 호박 덩굴을 걷고 토마토와 가지를 뽑았지만 부추는 항상 지금이 최고라고 말하는 듯 당당했다. 몇 번이나 밑동을 싹둑 잘라먹어도 며칠 후면 삐죽하니 올라오던 새잎들, 처음에는 신기하고 반가워서 행여 꺾일까 고이 다루었지만 장마를 건너 염천을 지나온 후에도 여전히 무성한 부추를 보면 어쩐 일인지 한숨이 나오곤 했다. 부추김치와 부추전에 부추나물까지 몇 순번이 돌고 나면 부추 앞에 앉아서도 통통하게 자란 부추가 안 보이는 것처럼 능청을 떨었다.


부추와 나 사이의 승강이는 둘만 아는 전쟁이었다. 여름의 태양이 저렇게 기세등등한데 부추가 먹을만할까? 보나 마나 세어버려서 끓는 물에 소금을 넣고 데쳐도 질겨 먹지 못할 게 분명할 거라고 볼멘소리로 중얼거리며 부추 앞에 앉아 밑동에 가위를 갖다 대면 잘리는 순간 비명처럼 터지는 부추 향기는 내게만 들리는 웃음소리 같았다. 매번 내가 패자였다. 못 본 척하기, 엉킨 실타래를 잘라 버리듯 뭉텅이로 잘라 잡초 바구니에 던지기, 포기를 양손으로 잡아 쥐고 온몸에 힘을 실어 잡아당기다가 엉덩방아를 찧은 건 또 몇 번인가. 마당에 나갔다가도 부추 같은 건 모른다고 그대로 지나쳐 오기도 여러 번이었다. 상 차리고 설거지하는 내내 코끝에 부추가 붙어있기라도 한 듯 고개를 돌릴 때마다 훅 끼쳐오는 익숙한 냄새가 건드리는 건 내 안에 숨어있던 목소리 - 부추가 부럽다는, 부추를 닮고 싶다는, 부추처럼 향기롭고 부드러워지고 싶다는, 부추처럼 햇볕이나 비 따윈 겁내지 않겠다는 - 였다. 어둔 구석에 꼭꼭 눌러 담아 아무도 모르겠거니 했는데 설마 앵두나무 그늘에서 한량처럼 흔들거리는 부추에게 들켜버릴 줄 상상이니 했겠는가.



전쟁은 언젠가 끝이 나게 마련이다. 싸움 끝에 더 다정해지는 부부처럼 부추는 별이 되고 나는 별을 모아 사방을 밝혔다. 행여 작은 꽃잎이 다칠세라 꽃대를 길게 잘라 꽃병에 꽂아두었다. 한 움큼 묶어 좋은 이의 가슴에 안겼고 부추 밭 앞에서 일어날 줄 모르고 코를 킁킁거리며 눈을 감고 몸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별무리 속에서 봄날의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여름밤 번개가 번쩍거렸다. 부추는 이런 날이 올 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숲에서 건너오는 초저녁 바람에 건들거리는 부추가 말을 건넨다.


고개를 외로 꼬고 아닌 척을 해봐야 네가 가긴 어딜 가겠다고. 고작 꽃잎 여섯 장이 전부인 작은 꽃 앞에서 꼼짝도 못 할 거면서 말이야. 내친김에 내가 알고 있는 걸 몇 개만 더 알려줄까? 유리창 안에서 망설이는 네 모습을 나는 매일 보고 있었다고. 울렁거리는 가슴을 쓰다듬는 네 손길도, 찬 물컵을 들고 있는 네 손가락의 움직임도 알고 있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토해내는 한숨, 고개 숙인 웃음, 개미와 벌이는 숨바꼭질도 다 엿봤지. 간혹 너도 모르게 소리 내어 말해버린 얘기들도 전부 기억하고 있다면 놀라려나. 아무도 없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우린, 네 마당의 우리들은, 그러니까 온 우주는 벌써 다 알고 있었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들었고 그리고 기억했지. 그러니 외로우면 우리를 기억해. 반짝이는 별들을, 푸르게 흔들리는 부추꽃을 여름처럼 잊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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