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한 나라의 음악을 보면 그 나라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어요. 어떤 나라의 음악이 슬프면, 그 나라에는 미래가 있는 거예요. 어떤 나라의 음악이 장엄하면, 그 나라는 주위의 다른 나라를 괴롭히게 돼 있어요. 음악에 영혼이 없으면, 그 나라는 오래 못 가요. - 알렉스 마셜 지음, 박미준 옮김, 『국가로 듣는 세계사』 중에서 발췌
수카르노(Sukarno)는 한 줄로요약이 안 되는 인물입니다. 몇 자 끄적여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써보겠다는 것만큼이나 얼토당토않은 일이지요.
수카르노는 성(姓)이없습니다. 수카르노. 그냥 이름만 있어요. 그리고 그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사실 그래서 더 위엄이 느껴지는 거 같아요. 원래 자와 사람들은 이름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어느 가문의 누구'라는 표식에 별로 신경 안 씁니다.
낼모레면 퇴임하는 조코 위도도(Joko Widodo) 인도네시아 대통령 아시죠? 이제 서른일곱 살 먹은 아직 앳되어 보이는 아들 하나가 이번에 부통령 자리에 앉는답니다. 이름이 '기브란 라카부밍 라카(Gibran Rakabuming Raka)'에요. 인도네시아 노동자들과 교민 단합대회를 우리나라 안산에 있는 무슨 공원에서 했는데, 기브란이 그때 왔답니다. 경희대 음대 다니는 소프라노도 불러와서 인도네시아 국가도 부르고, 진짜 공식 행사로 진행했다니까요. 저는 그 사람 거의 바로 옆에 있었어요. 그렇게 정치 안 하겠다고 손사래를 치더니만. 내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사진이라도 같이 찍을 걸 그랬습니다. 아무튼 제애비랑 이름자 하나 겹치는 게 없어요. '라카'가 성이 아니거든요. 아버지 이름이 '조코 위도도'잖아요. 그냥 이름만 세 개 있는 겁니다.
이건 제 생각인데,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여권 만들 때 surname 공란에 적을 이름이 필요해서 그냥 하나 더 만드는 거 같기도 해요. 제 처제 이름도 '스파띠까 띠까'인데 '띠까'는 그냥 애칭이거든요. 성이 아니에요. 아내랑 처제랑 장인어른이랑 이름이 다 다르거든요.
수카르노는 '붕 카르노(Bung Karno)'라고도 불립니다. 이렇게 설명을 해드렸는데 설마 '카르노'를 성이라고 생각하시진 않겠지요?말레이어 단어 '붕(bung)'에는 '형제'라는 뜻이 담겼습니다. 그러니까 존경심과 친근감이 듬뿍 담긴 애칭입니다.
수카르노는 아구스 살림(Haji Agus Salim)이나 수탄 샤리르(Sutan Sjahrir)처럼 대단한 학자도 아니고, 나수티온(Abdul Haris Nasution)처럼 국민총동원 방위 개념을 주창한 탁월한 군사 전략가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수카르노는 군인 십만 명보다 더 큰 힘을 지녔어요. 연설만 했다 하면 대중을 확 사로잡아버리는 신비로운 힘 말이죠. 그리고 호남(好男)이었어요. 정말 인물이 훤칠하게 잘 생겼다니까요. 수카르노의 첫 연인은 네덜란드 소녀였는데, 그녀가 수카르노한테 홀딱 반해서 신분의 장벽을 뛰어넘는 연애를 했다지요.
수카르노의 일대기를 다룬 인도네시아 영화 '수카르노(Soekarno)'
오직 수카르노만이 대중에 직접 호소할 수 있었어요. 수카르노를 싫어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능력만큼은 인정했어요. 그래서 대오가 흐트러질 때, 결정적인 순간마다 수카르노가 마이크를 잡았어요. 네덜란드군이 수도를 장악하고 자와섬을 삼켜버리려는 긴박한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마디운(Madiun)에서 반란을 일으켜 인도네시아 공화국 정부가 위기에 처했는데, 그때도 수카르노가 이 메시지를 던졌지요.
"인도네시아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
와게 루돌프 수쁘랏만이 곡과 가사를 지은 '인도네시아 라야(Indonesia Raya)'에도 그렇게 나오잖아요. 단결을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갔죠. 그리고 그게 오늘날 인도네시아를 있게 했다고 저는 봐요. 네덜란드군에 제대로 맞서 싸울 무기도 없었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았기에 국제 사회로부터 독립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겁니다. 처가에는 벽걸이 에어컨 바로 옆에 검은색 뻬찌(peci, 인도네시아 남성들이 쓰는 챙이 없는 모자)를 착용한 수카르노의 전신 실루엣이 붙어있어요. 장인어른은 수카르노의 영혼이 아직도 인도네시아를 떠나지 않고 나라를 지켜준다고 믿으신답니다.
1945년 10월 17일, 인도네시아 재무부가 독립 국가의 지폐를 최초로 발행했는데 지폐 속 인물이 죄다수카르노였어요. 이제 마흔 중반에 접어드는 살아있는 지도자가 지폐 속 인물이 된 거죠. 사람들이 매일 만지는 게 돈이잖아요. 글을 못 읽는 사람도 수카르노 얼굴이 들어간 돈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인도네시아가 존재한다고 느꼈을 겁니다. 화폐도 이렇게 정치적 수단으로 쓰일 수 있지요. 당시는 네덜란드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자바 은행(De Javasche Bank, 동인도 식민지 중앙은행)권이 돌아다니는 혼란스러운 시절이었어요. 1952년 인도네시아 중앙은행이 처음으로 발행한 지폐에는 수카르노 초상이 빠졌습니다. 역시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 얼굴을 돈에 새기면, 주인공도 좀 민망할 것 같아요. 그런데 1965년 12월 화폐 단위 개혁 때 영(0)을 세 개 지우면서 수카르노 얼굴이 다시 잠깐 등장합니다.
그해는 아주 힘겨운 시기였습니다. 경제는 연간 500%가 넘는 높은 인플레이션과, 무역 적자, 그리고 외채 부담으로 침체에서 벗어날 줄 몰랐고, 수카르노가 말레이시아 건국에 반대하며 '대립(Confrontasi)' 노선을 추진하다가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비동맹'을 부르짖으며 소련과 중국 등 공산권 국가들과 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제 관계가 약화하였습니다. 결국 외자가 빠져나가면서 인도네시아 경제는 더 어려워졌지요.
게다가 9월 30일에 공산주의자들이 쿠데타를 기도(企圖)하다가 실패로 끝나 전국이 발칵 뒤집혔는데, 현지에서 '9·30 사건(G30S)'이라고도 불리는 이 쿠데타는 수하르토(Soeharto)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에 의해 진압됩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인도네시아 전역에서 공산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고, 많은 공산주의자가 체포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일각에서 10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도 해요. 전국이 뒤숭숭했지요. 국정 권한도 대부분 수하르토로 넘어갔습니다. 그래서 수카르노는 본인의 얼굴이 들어간 화폐를 다시 찍어내어 꺼져가는 정권의 지도력을 되살리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인도네시아 독립 선언 후 최초로 발행된 1루피아권 지폐. 당시 최고액권 화폐였던 100루피아권까지 모두 수카르노의 초상이 들어갔다.
그러다 수하르토(Soeharto, 1968~1998)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수카르노는 화폐 인물에서 밀려났습니다. 수카르노는 1970년 6월 21일 숨을 거두는데, 수하르토는 대대적으로 수카르노의 흔적 지우기에 돌입합니다.독재자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자길 가리는 걸 못 참습니다. 정권 말년에는 최고액권인 5만 루피아권 지폐에 수하르토 본인이 직접 출연했지요. 그도 수카르노처럼 되고 싶었나 봅니다.하지만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로 민중이 들고일어나 30년 이어온 수하르토 정권도 붕괴합니다.
민주화 이행으로 개혁 시대(Reformasi)가 열리면서 지폐에 수카르노가 재등장했는데, 이번에는 혼자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마트라의 미낭카바우(Minangkau)족 출신 민족운동가 모하맛 핫타(Mohammad Hatta)와 나란히 10만 루피아권 모델이 되었답니다. 두 사람은 새 나라의 대통령과 부통령을 지낸 적이 있거든요. 그리고 10만 루피아권은 그렇게 쭉 이어지고 있어요. 5만 루피아권, 2만 루피아권 등 다른 지폐는 계속 인물이 바뀌는데 10만 루피아권은 항상 '수카르노-핫타'예요. 이때 인도네시아 국가(國歌)를 쓴 와게 루돌프 수쁘랏만도 5만 루피아권에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국가를 쓴 작곡가에 걸맞은 예우를 해준 셈입니다.
그렇다고 수카르노가 요즘도 무슨 개인숭배 대상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의 동상이 여기에 저기에 아무 곳이나서 있지도 않습니다. 애들 다니는 학교 교실에 수카르노 사진이 붙어있지도 않습니다.정말이지 자기 손으로 동상 세우는 것은 푼수나 하는 짓입니다. 그 많던 스탈린 동상이 다 어떻게 됐죠?튀르키예에 가면 말이죠, 학교나 관공서에나, 심지어 배 나온 아저씨들이 금연 표시는 아랑곳하지 않고 줄담배를 피워대며 각설탕을 손에 집히는 대로 때려 넣은 홍차를 마시는 다방에서도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초상이 걸려있습니다. 가끔 여기가 북한인가 싶을 정도예요. 거기선 아타튀르크 얼굴을 안 보고 단 하루도 살 수 없습니다. 게다가 애들 학교에서는 '아타튀르크의 원칙과 혁명사(Atatürk İlkeleri ve İnkılap Tarihi)'가 의무 교과목입니다. 물론 다 이유가 있긴 하지요. 이슬람 세계의 중심이었던 오스만제국의 유산을 한꺼번에 지우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까요.
수카르노는 '인도네시아 라야'가 웅장하게 울려 퍼지길 원했습니다. 식민 지배자였던 네덜란드 국가 '헷 빌헬뮈스(Het Wilhelmus)'를 이기고 싶었을 겁니다. 그가 네덜란드 경찰에 붙들려가서 감옥에 갇히고 자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당했을 때, 네덜란드군 연병장에서 흘러나오는 장엄한 곡조의 '헷 빌헬뮈스'를 매일 들었을 겁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그런 노래를 동경했던 것 같습니다. 그 노래보다 더 웅장한 조국의 노래를 꿈꾸면서 말이죠. 말레이시아 영토까지 그 안에 넣는 거대한 해양 제국 '누산따라(Nusantara)'를 부활시키고 싶었던 인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