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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아하게 가난'해질 수 있을까?

폰 쇤부르크의 베스트셀러,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을 읽고 보니..

1. 생각해보니 난 돈의 노예였다

퇴직 후 난 '회사의 노예'로 산 줄 알았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좀더 정확하게 난 '돈의 노예'로 살았던 것이었다. 회사에서 시키는 일을 한다, 즐겁지가 않다, 크고 작은 위안을 위해 카드를 긁는다, 월급을 카드대금으로 날린다. 이런 악순환이 끝도 없이 벌어졌던 것이다. 최근에 나는 또 장바구니에 잔뜩 6-7개의 아이템을 넣었다. 합쳐보니 10만원이 좀 넘는다. 딱히 필요하진 않지만 이유없이 탐이 난다. 언젠가 꼭 필요할 것만 같다. 사실 사야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담기만 할 뿐 대부분 사지 않는다. 돈을 아껴야 한다. 언제 돈 나갈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월급을 받고 살 때도 이처럼 건전한 소비생활을 영위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3초도 되지 않아 절대 그렇게 되지 않았을 거라는 판단을 내린다. 회사에서 시키는, 해야하지만 하기 싫은 일을 하고 나면.. 나는 작은 위안을 위해 기꺼이 신용카드를 꺼내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는 곳(광고회사)에서는 아무도 당신이 행복해지길 원하지 않아요행복한 인간은 소비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프레데릭 베그베데르 (저서 '99프랑중에서)



2. 그렇다, 난 너무 우울했던 것이다

정말 그랬다. 도대체 일은 끝도 없고, 누구 하나 잘한다는 사람도 없고, 나를 우울하게 하는 인간군상들은 널렸다. 퇴근 후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면, 자동적으로 10분만 달려가면 되는 모 백화점 매장이 눈 앞에 떠오른다. 그 얼마나 정돈이 잘되고 친절하고 편안한 공간인가? 그 공간을 종횡무진 1-2시간 쏘다니다 보면 손에는 전리품처럼 쇼핑백이 들려있다. 대부분 특가나 이월상품으로 훅 다운이 된 가격으로 샀기에 나름 뿌듯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런 제품들은 사이즈가 좀 안맞는다거나 계절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거나 디스플레이 되어 손이 탔거나, 무엇보다 지금 꼭 필요하지 않거나... 등등의 원초적 문제를 품고 있기 일쑤다. 물론 잭팟을 터트리는 경우도 있다. 자다가도 꿈에 나타난 상품이 떡허니 80% 세일 행거에 걸려있는 경우 말이다. 솔직히 이럴 때는 아드레날린이 마구 분출된다. 그리고 뇌는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 짜릿함을 다시 맛보기 위해 다시 백화점 사냥을 나선다. 


그랬던 내가... 월급봉투를 포기하게 되면서 백화점에 발길을 뚝 끊었다. 사랑하지만 헤어지는 커플이 있듯이 어쩔 수 없는 이별이었다. 이제 난 무엇으로 위안을 얻을까? 그런데 예상 밖에 일이 벌어졌다. 아쉽고 또 아쉬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옷은 사둔 거 입으면 되고, 출근도 안하는데 가방이 뭐가 필요하겠는가? 신발도 이미 다 구비되어 있다. 솔직히 요즘 옷장이나 신발장을 열면 기분이 참 좋다. 딱 필요한 것만 있으니까. 그런데 전엔 이런 기분을 못 느꼈다. 그저 다음엔 또 뭘 살까? 뭐가 또 없는 거지? 이런 생각 밖에 안했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하기 보다는 없는 것에 안달을 했다. 그 갈증은 절대 채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태산 같은 쇼핑욕구가 참 말도 안되게 사라진 것이었다. 멈추면 보인다고 하더니... 끝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살짝 비켜서자 귀에 웅웅거리던 기계소리는 사라지고 나는 카드 긁기를 멈출 수 있었다. 평정심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3. 쳇, 우아하게 가난해질 수 있다고?

이런 나의 상황을 잘 설명해주는 책을 만났다.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이라는. 저자는 알렉산더 폰 쇤부르크이다. 그는 이 책으로 이미 독일과 영국에서는 유명인이 된 자유기고가이다. 이 사람이 쓴 책을 사람들이 30만권이나 사간 이유는 몇 가지가 있다. 일단 우리가 재벌이니 갑부니 하는 말에 뻑(?)이 가듯이, 외국에서도 ‘귀족’이라는 말에 혹하나 보다. 하긴 평생 먹고 사는 고단함과는 담 쌓은 부러운 부류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다. 한참 전 갤러리에서 일할 때, 빠리지점에 출장을 갔을 때였다. 거기서 일하던 화가들 또는 현지직원들이 고객들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면, “그 사람은 어마어마한 부촌지역에 산다, 귀족출신이라더라...” 이런 말을 마치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신나게 했다. 아닛!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수백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귀족이란 단어가 유효한가 싶어 의아했다. 폰 쇤부르크는 바로 그런 유서 깊은 귀족가문의 후예다. 단, 완전히 쇠락해버린.


"나는 부끄러운 가난의 세계와 뻔뻔스러운 부의 세계 사이를 능숙하게 넘나들었다. 이제는 고인이 된 우리 매형 요하네스 폰 투른 운트 탁시스 후작이 나를 즐겨 데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석유 생산국의 왕자, 인도의 토후, 재계 및 정계의 실력자들과 한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이튿날 아침에는 다시 학교에 가서 강의를 듣거나 자유기고가로서의 삶을 헤쳐 나가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낮에는 사치와 향락에 둘러싸여 지내다가 저녁이면 수도꼭지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방 두 칸짜리 집에 앉아 있어야 하는 현실을 소화하지 못하는 웨이터들이 전형적으로 걸리는 사치 바이러스, 웨이터 신드롬과 평생 싸워야 했다." - 책 본문 중에서


한때 성에서 살며 지역경제를 호령하던 귀족이 우리 아파트 옆집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폰 쇤부르크가 그런 사람이다. 갑자기 실직한 후 슈퍼마켓에서 “내 형편에 유기농 달걀을 사도 될까?”하는 번뇌에 시달리고 수십년 된 양복을 깁고 또 기워 입는 부모님에 대해 안쓰러움을 느끼는 평범한 서민이자 귀족인 것이다. 그것도 여전히 성에 살면서 휴양지에 별장을 짓고 요트를 굴리는 귀족 친척들 틈바구니에서 말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쇤부르크와 그 부모님 누구도 이 사실을 안타깝거나 궁상맞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아하게 가난하게 사는 법을 체득하고 어떤 부자보다 멋진 삶을 꾸리며 살고자 한다. 살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지만 현재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멋지고 간지가 나는 삶을 사는 방법을 깨치고 있다. 유대인 속담에  “물고기를 줄 게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고... 수중에 돈 한 푼 없는데도 생활이 만족스럽고 궁상맞은 기분이 들기는커녕, 우아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능력이라면? 이 보다 경쟁력있는 능력이 있을까?


4. 멈추면 보인다더니...

예전에 한 개그맨이 한 프로그램에 나와서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가난과 궁핍’이라고 말해서 사람들을 웃기곤 했다. 그런데 내가 막상 월급봉투가 사라지고 평생 가난하게 살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처하자, 그게 꼭 그렇게 맞는 말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백화점에서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나서는 일이 뭐 대수냔 말이다. 예전에는 남들의 원고를 고쳐주고 월급을 받았는데 이제 내 원고를 쓰고 내 책을 쓴다. 다니던 회사 홈페이지엔 내가 만든 원고가 영상으로 만들어져 2천여편이나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엔 어디에도 내 이름이 써있지도 않을 뿐더라 내 소유도 아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만드는 글과 영상들은 내 것이다. 


"일의 의미와 목적은 여가를 즐기는 데 있다. 

우리는 일이 인류의 역사상 오랜 기간 영예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정말로 영예로운 것은 인간을 도와주고 치료하고 가르치고 보호하는 것이었다.

부득이하게 필요하거나 아니면 돈을 탐하는 마음에서 일을 했을 뿐이다." - 책 본문 중에서


앞으로 빠른 은퇴자의 세계에 연착륙해서 가고 싶은 여행도 살살 다니고 40대의 로망이라는 마당 있는 집에서 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빨리 이뤄지거나 말거나, 궁상맞지 않게 생활해 나갈 생각이다. 만족도가 있는 삶이라면 굳이 돈에 놀림당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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