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수잔 선생님은 브라만 계급이라네

말레이시아에서 수잔 선생님에게 영어과외를 받으며 느낀 것들

구세주의 등장

말레이시아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내 영어실력이 정말 꽝이라는 사실을. 못해도 그렇게 못할 줄 몰랐다. 하지만 콤플렉스는 갖지 않으련다. 하루 24시간 한국어만 하는 세상에서 살았는데, 잘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않나? 급한 대로 영어과외를 받기로 하고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수잔 조지' 선생님이었다.


수잔선생님은 60대 초반의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이다. 부모님이 인도에서 말레이시아로 이민오셨다. 선생님은 브라만이다. 고등학교 세계사 시간에 배운 인도 신분계급의 최상위에 있는 바로 그 브라만 말이다. 수많은 인종과 국적의 용광로, 말레이시아에 산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나의 다급한 사정을 들은 수잔선생님은 즉각 영어 인텐시브 코스를 시작하셨다. 하루 3시간씩 일주일에 3회를 공부하는데 외워야 하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정해주신 주제로 영작을 해서 발표를 하는데, 한 번도 쉬거나 웅얼거리면 안된다.


"선생님, 그러다 쓰러져요!"

내가 본 말레이 사람들은 항상 여유가 넘치고 한 박자 느린 템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수잔선생님은 달랐다. 선생님의 하루는 해도 해도 너무한다. 새벽 3시에 기상해서 1시간 기도를 한 후 식사와 청소를 하고 친정어머니 병문안을 갔다가 한시간 운전해서 내 수업을 하러 온다. 이후 성경공부 스터디를 하고 집으로 돌아가 다시 2명 정도 더 수업을 진행한다. 주말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세계 어디에서도 이처럼 열심히 사는 분을 본 적이 없어서 "선생님 그러다 쓰러집니다.." 걱정하곤 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선생님이 남편과 일찍 별거한 후 아들 둘을 혼자 키웠다는 사실이다. 아들 둘을 해외유학까지 보내고 좋은 동네에 이층집도 샀으니... 얼마나 열심히 일했겠는가? 크리스마스에 선생님 댁에 초대를 받았다. 마당부터 집안까지 먼지 하나 없이 정리가 되어 있었고 거실에는 부친과 모친의 사진과 가계도가 걸려있다. 우리나라식으로 족보인 것 같다.  선생님 삶의 원동력은 두 아들이겠지만 사실상 정신적인 기둥은 부모님과 브라만 계급의 자긍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물론 거기에도 명암은 존재한다. 같은 계급이라는 이유로 일면식도 없는 남자와 16세 나이에 정략결혼을 하고, 별거 후엔 20대부터 아들 둘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으니 말이다.


브라만이 대단한 걸까, 수잔선생님이 대단한 걸까

억척쟁이 선생님은 항상 바쁘다. 남는 시간도 없는데 여기저기 영업을 하고 다닌다. 나한테도 영어공부에 관심 있는 친구가 있으면 연결시켜 달라고 하신다. 피가 통하지 않는다며 절고 다니는 선생님의 왼쪽 다리를 가리키며 "이제 그만 쉬엄쉬엄하세요, 플리즈~~"하고 말려본다. 물론 내 말을 들으실 리는 없지만.


처음엔 영어만 가르쳐주셨지만 선생님은 여러가지를 가르쳐주셨다. 길거리에서 도둑을 조심하는 법, 생필품과 야채를 가장 싼 가격에 사는 법, 식중독 위험이 있는 식당을 피하는 법, 인도 과자를 튀기는 법 등등... 무엇보다 품위있게 물잔을 드는 법도 알려주셨다. 선생님은 항상 나에게 "왜 그리 음식을 빨리 먹어?"하고 혼내시곤 하셨다. 나는 머쓱해서 '한국인은 스피드...'라고 말씀드리곤 했다.         


벌써 뵌 지가 1년이 지나가지만, 가끔 수잔선생님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16세에 결혼해 남들이 세상을 배우는 시기에 집에 갇혀 있던 분이, 도대체 왜 그리 독립심도 강하고 자존감도 강하고 자기성취적일까? 그 유명한 브라만이라서 선생님이 대단한 게 아니라, 선생님이 브라만이라 거기에 뭔가 있나 보다 생각하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말레이시아 사무실에서 일해보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