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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Stout Aug 12. 2020

영화를 만드는 것은 마치 똥을 싸는 것과도 같아

나의 2019년 어느 추운 겨울의 단편영화

    "Shits happen. And dramas happen whether you want or not. It’s like you’re taking a shit. You’re taking a shit whether you want it or not. And that’s what film is like to me. I am being a filmmaker just like I am taking a shit. I am doing this whether I want or not. Cause that’s just the way it is."
(거지 같은 일은 항상 일어난다.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드라마는 일어난다. 마치 네가 똥을 싸는 것처럼 말이다. 네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넌 똥을 싼다. 내게 영화는 그것과도 같다. 나는 똥을 싸듯 영화를 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냥 한다. 그냥 그런 것이다.)


  언젠가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외국인 학교를 졸업해,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내가 어떤 과정을 겪고 영화라는 종착지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그리고, 필시 이러한 과정 속에는 신의 섭리 내지는 그에 해당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외국인 학교를 다닌 것이 나에게 득이 됐는지, 아니면 실이 됐는지는 아직도 알 수가 없다. 그 학교에서 내가 배운 것은 비단 언어뿐만이 아니라 가치관과 세계관이었다. 변화한 가치관은 나를 어느 사회에도 속할 수 없게 만들었다. 한국에 있는 나는 단순히 참 진 자를 이름에 걸고 있는, 한국인보다는 교포 같은 인간상에 더 가까웠고, 미국에 있는 나는 행정상의 이름인 Hoffman 외에 영어만 미국 사람처럼 하는 한국인이었다. 중심가치 (Core Value)를 아직도 한국적인 정서에 기반하고 있어 김치 국물이 뚝뚝 흐르지만 동시에 치즈버거 냄새가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개인적으로 나는 영어를 하는 나 자신이 훨씬 편했다. 이런 비유가 적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영어를 하는 나의 모습은 남자가 된 것 같고, 한국말을 하는 나는 마치 여자가 된 것 같았다. 한국어에는 너무도 많은 제약이 있으며, 상대방에 따라 달라지는 대화 주제, 어투, 어휘 등이 나를 힘들게 했다. 마치 나 자신이 아닌 것처럼, 내가 상대방에게 궁금한 점, 하고 싶은 말에 대해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제약이 있었고, 난 자주 싸가지 없는 새끼로 여겨지곤 하였다. 물론 영어라는 언어가 완벽하게 이러한 점을 보완해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 자신이 그렇게 싸가지 없는 사람이 아니란 것을 어필할 여지를 주곤 했다. 적어도 그게 더 편했다.  

    미국과 한국  나라의 정서 사이에서 갈피를  잡고 있던 나는 결국 제대  대학을 가지 않았고, 선교회에서 봉사활동, 실패했던 대학입시, 영어강사, 다단계 기업, 미국 기업과 통역 업무 등의 과정 속에서  순간 갈피를 잃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똑같은 일상.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즐겁지 않았다. 그래, 돈은 좋았다. 생각보다 나는 고급 인력이었는지, 내가 예상했던 연봉보다  많은 돈을 주었다. 좋았다. 내가 처음으로 받은 급여는 20 년간 교회 목사로 일해온 나의 아빠의   사례금보다 많았다. 버스비가 없어 하루에  시간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통학하고, 교과서를 본하고, 교복은 인터넷에서 색깔만 맞춰 입던 내게는 전혀 새로운 세상이었다. 사고 싶은   사도 돈이 남는다니. 너무 신기했다. 고등학교 때는 사이즈 하나 남아 떨이하는 2 원짜리 컨버스 조차  사던 나였다.  

    물론 모든 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재미없는 사람들과 재미없는 일을 지루하게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사람들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왜 이 일을 하는지를 종종 물어오곤 했다.


    "그냥 원서 열심히 넣었는데 붙여주더군요."


   그렇게 대답을 하면서도 나는 '나는 너네가 그렇게 어렵게 들어온 이 회사를 쉽게 들어왔다고'라는 뉘앙스를 넌지시 흘리며, 나의 검정고시 졸업이라는 배경을 상쇄시키기 고자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정도의 같잖은 이유보다 다른 이유를 원했다. 외적으로 내게는 크게 부족한 것이 없었다. 회사의 모토도 좋았고, 급여도 좋았고, 업무 환경도 좋았다. 심지어 같이 일하는 사람들 조차 좋았다. 부족한 것은 내가 확신할 수 없는, 외부적인 것이 아닌 내부적인 이유였다.

    어차피 대학은 어떻게든 갈 생각이었다. 나는 미국에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를 들어가 4년제 대학으로 편입을 할 생각이었다. 난 평균치보다 높은 지능을 가진 사람이니까 어떻게든 되겠지. 난 입을 잘 터니깐. 그런 믿음이 내겐 있었다. 난 어떻게든 잘할 사람이라는. 하지만 무엇을 잘해야 되는지 에 대한 이유는 몰랐다. 적어도 당시에 하고 있던 일은 내가 잘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때 영화과 17학번 친구가 내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우리 학교 넣어봐. 나는 이미 영상원에 마지막 면접까지 두 번이나 가서 두 번 다 떨어진 이력이 있었다. 입시는 좀 지긋지긋했다.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래도 친구의 열렬한 추천에 시험을 봤고, 붙었다. 이 멍청한 학교는 입학 결과가 나온 지 5일 만에 등록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입학을 취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주식을 사버려 돈이 없어, 대출을 받아 등록금을 납부했다.  

    우아, 나도 이제 대학생이야! 처음에는 영화를 한다는 사실보단 대학생이 된다는 사실에 더 감격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 고등학교 때 처음 시작했던 영화. 과연 나는 이곳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작년과 저번 학기에는 여전히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무엇을 원하는가. 그리고 나는 영화 제작에 들어갔다. 이후 나는 수많은 드라마와 마주해야 했다. (드라마는 영어로 표현했을 때 일상에서 마주하는 극적인 상황을 의미하는데, 촬영 때 갑자기 비가 내린다던지, 친구와 싸웠다던지 이런 부정적인 상황들을 주로 의미한다) 그 드라마들은 나를 완전히 좌절시켜 땅바닥에 매다 꽂을 만큼 영향력이 컸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동기를 빼앗았다. 내가 나중에 상업현장에 나갔을 때 마음속에 한 줌 갖고 싶었던 우리들의 영화라는 미래의 추억은 배신과 서로에 대한 질타로 얼룩져 현재의 악몽이 되었고, 예산은 내가 처음 예상했던 수치를 뚫고 고공 행진했다. 난 빚을 400만 원 가까이 지게 됐다. 오른쪽 발목에 연골이 없어 남들보다 쉽게 방전되는 체력은 낮밤을 너무 많이 지새워 버텨주지 않았고, 자주 기절하고, 정신을 잃곤 했다.  

    그래, 영화를 얕봤다. 아니, 좋은 영화를 내가 얕봤다. 좋은 영화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 영화에게 그야말로 엉덩이를 걷어 차인 것이다. 내가 갖고 있던 영화를 하고 싶은, 해야 하는 이유는 실제 영화 제작이라는 벽 앞에 추풍낙엽처럼 바스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했다. 밤을 계속 새웠고, 수업을 다 나가고, 과제도 다 해가고, 영화를 계속했다. 미쳐버린 게 분명했다. 난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심지어 이런 생각도 하찮은 생각이었다. 이미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바쁘고 피곤해 그런 생각을 할 여지도 없었다. 기도? 기도하면 손이 놀았다. 그럴 바에 나는 책을 한 장 더 읽었고, 한 발자국 더 움직였다. 그렇게 3회 차 영화 촬영이 끝났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았다. 영화는 나에게 무엇인지, 영화를 왜 하고 있는 것인지. 나는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답을 모두 잃어버렸다. 영화라는 유기체와 무기체를 넘나드는 미지의 존재 앞에 나의 가치는 무기력했다.

    다만 하나 남은 사실이 있었다면, 나에겐 더 이상 동기가 필요 없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움직이고 있었다. '아,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라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누군가 왜 글을 쓰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고 했다. 물론 나와 하루키를 비교하는 것은 감히?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겠지만, 나의 상황과 상당히 유사한 지점이 있었다. 그의 대답은 ‘자신은 3루 타자가 달리듯 글을 쓴다’는 것이었다. 3루 타자가 생각할 시간이 있느냐는 것이다. 타자가 볼을 치면 그게 볼이든, 안타든, 홈런이든, 일단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내가 영화를 위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뛰어든 것처럼. 그냥 해야 했다. 이야기를 쓰고, 배우들과 리허설을 진행하고, 배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촬영자와 편집자, 조연출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그들과 밤을 새웠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 라는 질문은 뒤로한 채 말이다.  

    문득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드라마는 어차피 생겨난다. 내가 원하 든 원치 않든. 마치 배설같이 말이다. 내가 똥을 싸는 걸 원하든 원치 않든, 생존을 위해 그냥 해야하 듯, 나는 그렇게 그냥 영화를 하고 있었다. 영화를 하는 이유는 결국에 찾지 못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재밌으니까, 보람 있으니까,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것, 좋으니까, 예술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그것들은 답이 되지 못했다. 나는 그냥, 그저 할 뿐이었다.

    바깥에서 대변을 보는 행위를 나는 '외변'이라 부르곤 했다. 어렸을 때 나는 소위 '외변'을 하지 못했다. 가장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간이어야 하는 화장실이, 한 칸 벽으로만 이루어졌다니. 용서할 수 없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 때, 어느 날, 급식으로 나온 흰 우유를 마시고 배가 아파, 얼굴이 노랗게 질릴 정도로 화장실이 급했던 어느 날이 있었다. 머릿속에는 비밀스럽고, 개인적이고 자시고 할 것 따윈 생각나지 않았다. 바지에 쌀 바에는 공공화장실을 찾으며 후다닥 달릴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하는 것은 마치 그것과도 같았다. 그냥 그렇게 나도 무작정, 후다닥 달렸다. 지금도 여전히, 똥이 마려워 아픈 배를 부여잡고, 후다다다다닥. 그렇게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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