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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스타우트 Aug 12. 2020

나는 왜 쓸 수 없었는가

조지 오웰은 "나는 왜 글을 쓰는가"하고 물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어떤 사건이 있었다.

    어렸을 적에는 상상만 하던 사건이, 영화나, 드라마, 특히 노래에서나 자주 듣던 사건이 있었다. 생각보다 거대한 무언가처럼 일어나진 않았고, 그런다고 너무 일상처럼 다가오지도 않았다.

    이건 현실인가?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현실이기엔 너무, 뭐랄까, 드라마 같지 않은가?

그냥 그런 생각을 자주 했다.

    

    행복.

   이 어떤 사건은 행복과 연관이 꽤 깊었다. 아, 나도 행복할 수 있구나. 행복한다는 건, 크게 이상한 것은 아니구나. 살고 싶다. 아, 삶에 대한 욕망이, 의식적으로도 이렇게 표출될 수 있구나.

   더 살고 싶다. 더 보고 싶다. 더 알고 싶다. 이 의식과 자아를 그대로 가지고, 더 숨을 들이쉬며 내쉬고 싶다. 그럴 수가 있구나. 행복이란 게, 내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내 안에 괴상망측한 것들에 압사당한 줄 알았던 행복이란 게, 사실은 다른 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었구나. 너무 예상 못한 곳에 있어서 몰랐던 것이었구나.


    그 이후, 또 어떤 사건이 있었다.

    처음 사건보다 더 자주 상상했었던 사건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특히 노래에서나 자주 듣던 거 말고, 내 안에서, 알지 못한 누군가와 벌어졌던 일에 대한 상상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상상해 왔던 것인데도, 상상에서 겪었던 일처럼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어마어마하게 힘든 일이었구나. 내가 너무, 곧이곧대로, 쉽게만 생각했던 것이었구나. 때론, 정신이란 것이 육체를 초월하다 못해, 내 육체가 정신의 껍데기 안에 갇힐 수도 있구나.

    더는 살기 싫다. 더는 보기 싫다. 더는 알기 싫다. 더 이상 나라는 존재를 가지고 숨을 쉬고 싶지 않다. 행복이란 것이 없어진 것이 불행이었는데. 여태 믿어왔던 나의 상태는 불행이 아니고 그냥 중성의 상태였다는 걸, 진짜 불행을 겪어보니 알게 되는구나. 가슴 중간에 어딘가가 저려오는 게, 지릿, 지릿, 지릿, 지릿. 이렇게 아플 수가 있다니. 이렇게 힘들 수가 있다니.


    첫 번째 사건은 만남이었고, 두 번째 사건은 상실이었다.


    내가 쓰는 것에 자신이 없어진 것은 그때부터였다. 나의 글감을 주로 나의 상상 속의 누군가와의 만남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마음 아프게 보고 싶어 하지만 그, 혹은 그녀를 만나본적조차 없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요, 역설이었지만, 상상 속의 누군가는 형체가 있다가도 스르르 사라지곤 했고, 내가 믿는 예수가 되기도, 내가 좋아했던 소설 속 인물이 되기도 했다. 난 어떤 인물을 상상했고, 어느 날 상상 속에서 그가 내가 상상했던 인물이 아니었을 때는 아쉽기까지 했다. 인간은 종교성을 갖고 있기에, 나는 어쩌면 구원자를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체화되지 못한 이 상상의 인물은 신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기독교의 완벽한 신이라고 치기엔 치기 어린, 완전한 불완전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이 그리움의 대상을 기적이라고 부른다. 완전함 속에서 기적은 일어나지 않으니까. 기적은 불완전성과 완전성 모두를 가지고 있으니까.

    이 기적은 내가 음악을 들을 때, 혹은 공상 속에 빠져있을 때, 그 두 손을 불쑥 꺼내어 내 뇌를 만졌다. 잔잔한 이별 음악을 들을 때, 나는 화자가 되어 기적을 그리워했고, 사랑이 넘치는 재즈음악을 들을 때, 기적은 내가 사랑해 어쩔 줄 모르는 누군가였다. 기적은 매분 매초 나를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성의 갑옷이 무뎌지고, 감성이라는 속살이 드러나면 그는 예고 없이 나를 찾아왔다. 닿을 것 같지만 닿지 못해 안타까운, 누군지 몰라 그리워해도 그리워할 수 없는. 그런 기적을 나는 사랑했다. 애타는 그리움을, 닿을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을.

    그러던 어느 습하던 여름날, 나는 기적을 만났다. 그리곤 어느 낙엽 타는 냄새가 나는 가을날, 기적을 잃었다. 상상의 영역에 있던 기적을 현실로 끌어내린 젊은이의 실수는 상상했던 것보다 더 큰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그 이후로 쓸 수가 없었다.


    쓰는 것이 괴로웠기 때문에,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부르는 편이 오히려 정확하다. 내 글감은 항상 기적에 대한 상실이었고, 상실에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힘든 것은 아니었다. 다만 같은 주제를 마주해야 하는 상황을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지릿, 지릿, 지릿 지릿. 흰 종이 위에 검은 잉크가 번져갈 때, 마음속 저리는 느낌도 번졌다. 그 느낌이 싫었다.


    나는 왜 쓰는가. 나는 항상 글이란 남에게 보여야 비로소 그 본질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고, 글을 쓺을 생업으로 삼고 싶은 사람이었다. 나 혼자 쓰고 보는 글로는 생업을 유지할 수 없을뿐더러, 내게 크게 큰 의미가 없었다. 가끔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글이 있긴 하지만 그건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다고 여겼다.

    글 쓰는 것이 싫어져 글을 쓰지 않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언제 다시 글을 쓰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지금 이 순간도, 이게 마지막이지 않을까, 이게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지만.

    누구나 겪는 일이고 나만 유난스럽게 치를 떠는지도 모른다. 기적의 상실은 기적뿐만 아니라, 이미 많은 것을 가져갔다. 본래 모든 것에는 득과 실이 있다고들 했지만 상실은 이름 그대로 실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내게서 너무도 많은 것을 가져갔다. 나의 전부라고 여겼던,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행위라고 여겼던 '쓰는 행위'를 가져갔으니. 그것은 마치 내 모든 것을 가져가 버린 것만 같다.

    나는 언제 다시 글을 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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