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모든 웅크린 것들을 위하여
12월..
나희덕의 시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을 읽는 아침. 모든 소란이 잠시 가라앉은 시간..
아직 끝나지 않은 혼돈 속에 12월을 맞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일은 찻잔 속에 부는 태풍 같다.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나희덕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막다른 기슭에서라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무언가 끝나가고 있다고 느낄 때
산이나 개울이나 강이나 밭이나 수풀이나 섬에
다른 물과 흙이 섞여 들기 시작할 때
당신은
기슭에 다다른 당신은
발을 멈추고 구름에게라도 물었어야 했다
산을 내려오고 있는 산에게
길을 잃고 머뭇거리는 길에게 물었어야 했다
.....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생겨난 비탈 끝에는
어떤 기슭이 기다리고 있는지
빛이 더 이상 빛을 비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지막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그래도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모든 무서움의 시작 앞에 눈을 감지는 말았어야 했다.
인생의 기슭들... 기슭이란 언제든 도사리고 있는 잠재적인 불안 같은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생겨난 비탈 끝에는
어떤 기슭이 기다리고 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빛이 더 이상 빛을 비추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지막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그래도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모든 무서움의 시작 앞에 눈을 감지는 말았어야 했다고.. 시인은 말한다.
한 해의 끝. 그러지 말았어야 할 일들과 그랬어야만 하는 일들을 생각한다.
1월의 결기 가득한 포부는 사라지고 초라한 다이어리 끝자락에서 1년 동안의 나를 다시 만난다. 겨울엔 봄을 기다리고 봄엔 여름을, 여름엔 가을을... 그리고 가을의 끝엔 또다시 겨울이다.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반복되는 자연의 질서다. 무덤덤해 보이는 그러나 치열한...........
나는 무엇을 했을까..... 대체 나는...
산책길에서 웅크린 것들을 본다.
제 나름대로 견디고 버티고 그래서 기어이 이기고야 마는 자연 속의 존재들
흔들리고 퇴색하고 말라가고...
인간의 눈에는 거의 조락의 기슭에 이른 것만 같아 보이는데 두 눈 부릅뜨고
모든 변화, 모든 비바람 모든 눈보라에 맞서고 있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아무도 어깨를 토닥여주지 않아도
그토록 의연하게 제 자리에서 제 몫을 다하는 그 거룩함을 마주한다.
대체 나는 무엇을 했을까.....
인생의 기슭에 이르면 준비 없이 달아나버릴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러고 싶지 않다면... 비루해지고 싶지 않다면.. 적어도 세상의 웅크린 모든 것들처럼 견디고 버티고 일어서야 한다 /려원
<사람학개론을 읽는 시간> / 수필과 비평사/ 려원 산문집
2022 아르코 문학 나눔 우수도서 선정
2024 원종린 수필문학상 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