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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갤러리 까르찌나 Jul 06. 2022

일리야 레핀 <신병 배웅>과  이반 부닌 <추운 가을>

<그림과 문학이 만났을 때 8편 >

일리야 레핀 <신병 배웅>과  이반 부닌 <추운 가을> 

: 아름다운 이별이란?


일리야 레핀 신병 배웅 1879년  캔버스에 유채  143x225  러시아 박물관


 태어난 모든 살아있는 것은 기약할 수 없는 수많은 이별 선상에 놓인다. 덜 아프고 덜 괴로운 이별이 있을까? 어떤 이별은 평생을 따라다니며 삶을 좌지우지하고 어떤 이별은 목숨과도 바꿀 만큼 생의 전부를 차지할 때도 있다. 또 별거 아니겠지 하며 쉬운 재회를 점쳤던 그 이별이 평생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다.

우린 쉽게 이별의 크기를 평가하며 인고의 시간을 가늠하지만 우리 앞에 놓인 수많은 이별 앞에 아무렇지 않게 늠름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거다. 예측할 수 없는 아픔이 이별이다.


 그런 이별, 누구나 겪고 누구나 아픈 이별, 그 이별을 이야기 해 보려 한다.


 이별의 아픔이 주는 고통은 산소가 없는 곳에서 호흡하려는 것과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공기 없는 곳에서 아무리 호흡하려 해 봤자 숨을 쉴 수가 없고 몸속의 산소가 고갈되면 죽음에 이르는 것처럼 이별이 주는 고통은 그렇게 서서히 우리를 옥죄어 온다. 그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겠지만 산소가 없는 이별 세상에서 숨 쉬는 특별한 방법을 스스로 습득해야지만 새로운 숨쉬기를 할 수 있다. 그건 이별 전 세상에서와는 완전 다른 모습이 되어 새롭게 살아가는 거다. 이별이란 놈이 내 몸을 완벽히 지배해 숨이 끊어지기 전에 무조건 그 호흡법을 습득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별에 지배당해 우리는 죽게 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치명적인 것은 죽음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이별하는 것일 거다.  아마  죽음이 다가와 세상을 하직하지 않는 이상 평생을 함께 할 고통이다.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고 옅어질 거라 착각하지만 그건 잠깐의 망각일뿐 옅어지는 이별은 없다.

                                                                 

이반 부닌의 <추운 가을> 러시아어판

여기 평생을 가슴에 묻은 아픈 이별이 있다.

이반 부닌의 <추운 가을>은 사랑하는 약혼자를 전쟁터에 떠난 보낸 후 영원한 이별을 겪는 여인의 슬픔을 그린 소설이다. 그녀는 약혼자를 전쟁으로 잃은후 30년을 부족한 산소를 나눠 거친 숨을 몰아쉬는 이별의 삶을 살아간다.

 사랑하는 이 연인들이 헤어지던 그 가을 날을 작가 부닌은 ‘추운 가을’이라 표현했다. 가을이 쓸쓸하다는 표현은 많이 들어 봤지만 추운 가을이라니, 뭔가 녹녹지 않은 주인공의 생이 엿보이는 절묘한 제목이다.

 소설에서 주인공의 아버지가 “너무 때 이른 추운 가을이야”라는 말로 계절에 대한 운을 뗀다. 그리고 러시아에 최초 노벨 문학상을 안겨준 이반 부닌 답게 구석구석 보석 같은 표현들로 작품 전반에 걸쳐 이별의 아픔 심정들을 그림처럼 펼쳐 보여 준다. 서정적이고 잔잔하게 가슴 뭉클함을 전달한다.


 작품 속 스산하고 차가운 가을 날씨는 주인공들의 시린 미래를 예견하는 것으로 “나는 발코니 문으로 다가가 손수건으로 유리를 닦았다.  뜰에, 검은 하늘 위에는 깨끗한 얼음 같은 별들이 선명하고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러시아 대표 문학선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외 지음/최병근 옮김, 써 네스트 P102)고 일찍 시작된 초겨울의 냉기를 뿌옇게 서린 서리로, 반짝이며 빛나야 할 별들을 얼음 같은 냉기로 표현한 부닌은 정말 천재 작가답다. 그러면서 전쟁으로 헤어져야 하는 연인의 영원한 이별을 이 대목에서도 어렴풋이 예견하게 한다.


 또, 사랑하는 두 사람이 전장으로 떠나기 전날 밤 산책하며 나누는 절절한 대화를 그림같이 보여주며 그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가슴 아프게 영원할 것임을 애틋하게 보여준다.

여인을 사랑하는 남자는

당신 눈 반짝거리는 것 좀 봐! 춥지 않아? 날씨가 완전히 겨울 날씨야. 내가 죽더라도, 곧바로 나를 잊지는 않을 거지? “

나는 잠시 생각했다.

 ‘정말 갑자기 그가 죽게 된다면? 어쨌든 일정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그를 잊게 되는 건 아닐까? 모든 것은 결국에는 잊혀지는 것 아닌가? ‘

이런 생각에 놀라 그녀는 서둘러 대답을 했다.

그런 말 하지 마! 난 당신의 죽음을 견딜 수 없을 거야!”

잠시 말이 없던 그가 천천히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내가 죽는다 해도, 난 거기서 널 기다릴 거야. 당신은 좀 더 살다가, 세상에서 조금 더 즐겁게 지낸 다음, 그리고 내게로 오면 돼.”

(러시아 대표 문학선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외 지음/최병근 옮김, 써 네스트 P103-104 )

 

이미 예견된 그의 죽음을 앞에 두고 이 둘의 대화는 평범하지만 무심히 우리 가슴을 슬프게 울린다. 너는 좀 더 이 세상에서 지내다 나중에 다시 만나자는 연인의 말만큼 가슴 아픈 사랑 표현이 또 있을까? 지금이 아닌 나중에 만날 인연이라는 슬프고도 애절한 이별의 언어다.

그렇게 그는 떠나고 싸늘한 주검이 되어 돌아왔다.

레핀의  <신병 배웅>에도 처절한 이별의 눈물이 있다. 사실 온통 전쟁으로 점철된 러시아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이 그림은 일상의 한 모습을 그린 것 일거다. 뭐 그리 특별하고 대단한 사건도 아니다. 하지만, 매번 아플 거다.

지켜보는 엄마의 모습 습작 (감정이 메말라 버린듯한 엄마의 얼굴)

 어차피 견뎌야 하고 보내야 하고 가야 할 그들의 운명이지만 끓어오르는 슬픔은 당연히 참을 수가 없다. 아내는 오열하고 엄마는 망연자실하다.

하지만 수많은 굴곡의 역사를 겪은 그들인지라 그림 전체에 체념이란 감정이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모두가  묵묵히 서서 떠날 이와의 이별을 그냥 삼키고 있다. 쏟아내는 통곡만이 슬픔의 표현은 아니다.

거친 현실 속에서 수없이 생채기 난 감정은 이젠 무덤덤만으로만 표현되는 19세기 러시아 이별의 한 모습이다. 아버지의 뒷모습에서 성큼 아들에게 다 가지 못하는 그의 서글픈 망설임이 더욱 가슴아프게 한다.

그렇게 아버지는 마치 기도하듯 아들을 배웅하고 있고 그를 배웅하러 마을 사람들 또한 나와 있지만 어쩜 잦은 이별에 그들도 지쳐 있는 듯 무기력해 보인다. 수많은 이별과 이별 속에 눈물이 메말라 버린 듯한 모습이다. 이렇게 떠나면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아는 것처럼 모두가 애써 무관심하려 하는 듯도 하다.

이반 부닌의 <추운 가을>에서 연인을 떠나보낼 때도 아마 이 그림 속  모습 같지 않았을까 !


포옹하는 농민들 일리야 레핀 에튜드 1878년 종이에 아크릴 29,9x 20 , 러시아 박물관

<신병 배웅>에서 젊은 여인의 처절함이 가장 극적이다. 뿜어내는 슬픔의 대표적 모습이다.

레핀은 등을 돌리고 슬퍼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수많은 습작을 그렸다 한다.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감정, 표정이 없어도 읽어낼 수 있는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모델들을 등장시켰고 여기 그 습작 중 하나가  있다. 원작보다 더 실감나는 비통한 슬픔이다. 등 돌려 슬퍼하는 여인에게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극적 슬픔이 배어 나오고 나도 함께 그녀를 안고 다독여주고 싶은 느낌이 생길 만큼 극적이고 사실적이다. 레핀을 천재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신병 배웅> 속 저들도 남자를 쓸쓸히 보내고 하염없이 기다리다 그의 죽음을 들을 수도  아님 다시 돌아와 기쁨의 재회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피 엔딩을 꿈꾸지만 그림 전체에서 보이는 비극적 긴장감이 그의 귀환을 쉽게 점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반 부닌의 <추운 가을>의 주인공 남자처럼 말이다.



<추운 가을>의 남자는 그렇게 떠난 지 한 달 후 사망한다. 그로부터 30년이란 세월 동안 여자는 시간을 견딘다. 소설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다.


한 달 후 갈라치아에서 그는 사망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 수십 년 동안 나는 정말로 많은 일들을 겪었다. 이 시점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또 마법 같기도 하고, 머리로든 가슴으로든 이해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일들을 하나하나 기억 속에서 더듬다 보면, 이 시간들이 너무 길게만 느껴졌다.

러시아 대표 문학선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외 지음/최병근 옮김, 써 네스트 p104

 

남자가 떠나기 전 ‘좀 더 살다가, 세상에서 조금 더 즐겁게 지낸 다음’이라고 말 한 그의 부탁처럼 그녀는 30년을 견뎠고 이제 그의 곁에 가려한다.

특히 이 단편 소설의 백미인 마지막 부분은 이별을 견뎌내는 우리 인간의 모습을 너무도 진솔하게 표현한다. 그냥 참아내는 이별 말이다. 부족한 산소를 조금 나눠 가녀리게 숨 쉬며 버티는 그런 이별! 사실 어떻게 버티는지도 모르게 흘려가는 이별의 시간! 그 끝에 서서 지난 과거를 돌아보면 대부분은 이별을 걸어 삶을 지나오고 있는 거다.


이렇게 나는, 그 언젠가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고 경솔하게 말했던, 그의 죽음을 견디어냈다. 그러나 그 이후로 내가 겪었던 모든 일들을 회상하면서 항상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내 삶에는 무엇이 있었던가. 그리고는 스스로 답한다. 단지 그 추웠던 가을 저녁뿐이었다고, 그런데 그 가을 저녁이 있기는 했었던가? 그래, 아무튼 있었다. 이것만이 나의 삶에 있었던 전부였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부질없는 꿈이었다.

그리고 나는 믿는다. 뜨겁게 확신한다. 거기 어딘가에서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날 저녁의 사랑하는 마음과 젊음을 간직한 채. ‘ 당신은 좀 더 살다가, 세상에서 조금 더 즐겁게 지낸 다음, 그리고 내게로 오면 돼. ‘ 나는 좀 더 살았고, 조금 더 기뻐했다. 이제는 곧 그에게 갈 것이다.

러시아 대표 문학선 아름답고 광포한 이 세상에서 ,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외 지음/최병근 옮김, 써 네스트 P106

 

결혼해서 행복하기만을 꿈꿨을 연인 앞에 닥친 전쟁은 이 둘을 평생 이별하게 만들었다. 이 헤어짐 후 여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를 우린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먼저 간 자가 말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남겨진 자도 쉬이 많은 말들을 꺼내 놓지 못하지만 말이다.  


일리야 레핀 신병 배웅 부분화. 환한 빛 속에 노출되어 있다.

레핀의 신병 배웅에서는 그래도 난 희망을 가지고 싶다. 일리야 레핀의 환한 빛이 그림에 있으니 말이다. 사람을 중심으로 화사하게 빛이 비친다 그리고 그들 뒤로 난 열린 문에서 세상과의 소통 같은 것도 느껴진다.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통한다. 작가는 어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떼어 전장으로 나가야 하는 그에게 빛과 문이라는 소재를 통해 불멸의 삶을 부여하려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이반 부닌이 온화한 가을마저 차갑게 만들어 그들을 떼어 놓았다면 그래도 레핀만의 환한 빛은 막 전장으로 떠나는 그의 귀환을 점치게 하는  희망을 부여한듯하니 말이다. 현실의 슬픈 포옹 뒤에 해후의 기쁜 포옹을 감히 기원하게 만든다.


사실 아름다운 이별은 있을 수 없다. 견뎌내고 인고해야 하고 그리고 더 큰 이별도 감내해야 하는 것이 헤어짐의 속성이다. 하지만 이별의 시간 속에 촘촘히 쌓여 있을 순간순간을 아름다움으로 장식할 수는 있다. 그 시간이 쌓이면 한 폭의 아름다움이 되고, 인고의 시간 속에 우린 성숙이란 선물을 받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시간을 돌이켜 아름다운 이별이라 칭 할 수 있는 거 아닐까? 그렇게 아름다운 성숙이 아픔을 덮으면서 이별의 빛깔도 점점 옅어지는걸 거다.  





작가 이반 부닌



이반 부닌 초상화

모스크바 남부 보로네슈의 몰락한 귀족 가문에서 출생, 어린 시절부터 다방면에서 예술적 재능을 보였으며 4개 국어에 능통했다. 스물한 살에 첫 시집(1891)을 발표했고 스물다섯 살에 체호프 등 문인들과 교류를 시작했다. 스물일곱 살에 첫 단편집 <세상 끝으로>를 발표하여, 아름다운 시적 표현과 뛰어난 서정성이 드러나는 작품들로 러시아적 정서를 가장 탁월하게 표현하는 산문의 귀재라는 평가를 받았다. 개인의 감수성을 질식시키는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여 1920년 망명, 여든세 살의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망명 중 집필한 자전적 장편 소설 <아르세니예프의 생> (1933)으로 러시아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55년에 소련에서 부닌의 일부 작품들이 판금 해제되어 인기리에 출판되었지만 혁명 기간의 인상을 토대로 한 장편 <저주받은 나날들>(1925)은 오랫동안 출판되지 못했다.



화가 일리야 레핀(1844~1930)




 주로 초상화, 역사화, 풍속화를 탁월하게 그린,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회화의 거장이다. 중 양감 있는 구성과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는 화면 속에 러시아의 역사와 민중의 삶을 담았으며, 예리한 사색과 관조에 의거한 내면의 심리 묘사 가 탁월하다. 페테르부르크 황실 아카데미의 교 수(1894~1907)와 총장(1898~1899)을 역임했다. 1882년부터 이동파 전시에 참여하였으며, 1880년대 수많은 러시아 문화 엘리트-톨스토이, 투르게 네프, 고골,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르, 스타소프-와 귀족들의 초 상화를 그리며 작가 특유의 화법으로 천만 가지 인간 표정을 그려낸다. 주 요 작품으로 (1870~1873), (1884~1888), (1887), (1880~1891)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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