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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늘 Mar 13. 2022

분주한 뉴요커

속 빈 분주함

브런치 작가를 신청할 당시에는 "뉴욕을 좋아하지 않는 박사 유학생이 뉴욕을 좋아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싶다."라고 글을 썼다. (뉴욕을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는 나의 첫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하지만 오늘은 그 취지에 맞는 글이 아니다. 뉴욕, 아니면 미국살이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정말 좋아하려면 고운 정도 필요하지만 미운 정도 필요하다는 건 궁색한 변명이 되려나.


내가 떠올리는 뉴욕에 대한 이미지 중 하나는 사거리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켜지면 커피를 든 정장을 입은 무리와 코트를 입고 선글라스를 낀 사람들이 교차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절대 천천히 걸으면 안 된다. 성급하지는 않되 절도 있고 빠른 워킹을 해야 한다. 그리고 신호등이 바뀌면 차들이 분주함을 이어받아 움직이는 것이다. 차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들리는 경적소리와 크고 작은 차가 얽혀있어야 한다. 이 이미지는 비단 나만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아닐 테다.


가끔 이런 뉴욕의 분주함은 허상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뉴욕에 도착하기 전에 통신사 개통을 미리 진행해두고 싶었다. 민트 모바일이라는 미국의 알뜰폰 회사에서 유심을 미리 신청해둘 수 있었고, 마침 뉴욕에 친척이 살고 있었던 터라 친척의 집으로 유심칩을 배송해 두었다.


뉴욕에 도착하여 친척집에 앉아 유심칩을 바꿔 끼웠는데 휴대폰은 먹통이었다. 상담원과 채팅으로 연결되는데만 30분이 걸렸고, 연결이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연결이 끊어졌다. 다시 상담원 연결을 시도하니 30분을 또 기다려야 했다. 그리고 또 끊어졌다. 그렇게 2-3시간 정도를 흘려보내다가 얻은 답변은 "폰 초기화를 해보라"였다. 초기화를 하고, 역시나 작동하지 않았다. 휴대폰을 예전 상태로 복구하는데만 몇 시간을 더 사용해야만 했다.


그렇게 민트 모바일은 포기하고 다른 통신사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미국에서 공부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이 함께 묶여서 AT&T를 사용했던 덕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요금제에 들어갈 수 있었다. AT&T에 방문하여 유심칩을 끼우고 전화를 개통한 후, 친구에게 전화를 했는데 친구가 "어? 텍사스 번호네?"라고 했다. 뉴요커가 되기까지의 길은 역시 험난했다.


마침 AT&T에서 나선 지 10분이 채 안되었기에 집으로 가던 방향을 돌려, 휴대폰을 개통한 AT&T로 발걸음을 옮겼다. 개통된 번호가 텍사스 번호라는데 뉴욕 번호로 바꿔 줄 수 있냐라고 물으니 종업원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Account Owner가 텍사스에 적을 두고 있어 그 옵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다음에 내가 왜 뉴욕 번호가 아닌지에 대한 이야깃거리 하나 생긴 셈 치자며 AT&T를 나서야 했다.


그리고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왜 뉴욕 번호가 아니냐고 물어왔다. 나의 뉴요커 되기 실패기를 잠자코 듣던 친구는 자기도 Account Owner와 다른 지역에 사는데 본인이 거주하는 곳의 지역 번호를 받았단다. 다시 AT&T를 방문하고 싶진 않아, AT&T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번호를 바꾸는 옵션이 있었다. 번호를 개통하고 30일 내로는 무료로 번호를 바꿀 수 있다고 하여 기분이 조금 괜찮아졌는데, 대신에 이 경우에는 매장을 방문해야 한단다. 그렇게 다음날에 다시 매장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우습게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직원이 태연하게 번호를 바꿔줬다. 왜 번호 변경이 가능한데 안 된다고 했는지 물어보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그냥 관뒀다. 그리고 앞자리 3자리가 똑같은 여러 개의 번호를 보여주며 어떤 번호를 하겠냐고 한다. 그렇게 번호를 바꿨다.


그리고 그것은 뉴욕주 알바니 번호였다. 참고로 내가 현재 거주하는 곳에서 알바니까지는 차로 2시간 30분이 걸린다. 나는 차가 없는 진정한 뉴요커기 때문에 자전거 페달을 14시간만 밟으면 된다. 내가 우리 지역 번호를 알아보고 가지 않은 덕에 알바니 출신인 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뉴욕에 도착하고 3일 동안 통신사 일을 분주히 처리했다. 이 분주함은 어디서 온 걸까? 분주한 하루를 보내고 잠자리에 누어 오늘 무엇을 했는지 곱씹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깨달았을 때 오는 허탈함이 이 도시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허탈함이 이유모를 분주함을 다시 만들어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AT&T 관련 일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왜인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


그래도 3일 동안 통신사와 씨름했던 일이 뉴욕 생활을 갓 시작한 나에게 나름의 교훈을 남기긴 했다. 뉴욕에서 살아가려면 무엇이든 곧이곧대로 듣지 말고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말해야겠다 따위의 교훈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꼭 실(失)만 있었던 건 아니다. 뉴욕행을 결정할 당시, 나는 편안한 곳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한국에 있을 때의 나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원하는 바를 말하는 사람이 되었다. (동시에 약간 쌀쌀맞아졌다는 생각도 한다.) 아직은 지나치게 "뉴욕화"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거 보면, 지금은 뉴욕 곳곳에서 애정을 발견해야 하는 시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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