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그런 날이 있다. 냉장고를 열었는데 땡기는 음식이 아무것도 없는 날이. 전날에 사놓은 부대찌개 밀키트나 편의점 도시락엔 눈길도 가지 않는, 그런 날이 있다. 나는 그럴 때면 내 마음의 순리를 따르듯 냉장고 문을 쾅 닫고 휴대폰의 배달앱을 켠다. 평일엔 저녁을 집밥으로 꼬박꼬박 챙겨먹는 편이니 주말에 한번 쯤 배달을 시켜먹어도 양심이 찔릴 일은 없으리라. 아마도.
그러나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배달음식 중에서도 딱히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치킨은 저번 주에 시켜먹었고. 삼겹살은 그저께 구워먹었다. 피자는 너무 느끼해서 싫다. 자주 시켜먹던 덮밥집은 하필이면 오늘 문을 닫았다. 이 집은 오늘 단골 하나를 잃었다.
정말 드문 일이다. 끌리는 음식이 하나도 없다니. 의식주 3가지 중 식을 제일로 여기는 내가. 방 청소는 몰라도 주방 관리는 빼놓지 않고 하는 내가 말이다. 이변까진 아니지만, 나를 아는 사람이 본다면 적잖은 충격을 받을 상황이었다.
이렇게 되면 그냥 라면이나 끓여먹고 방에서 뒹굴거려야겠다. 주말의 행복은 식사말고도 많으니까. 만약 평일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하루종일 기분이 찝찝했을 것이다. 나는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수납장에서 라면봉지를 집어들었다.
'어?'
그때 참치캔이 내 시야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의식을 사로잡았다. 왜 나는 지금 참치에 온 신경과 관심을 기울이는 걸까. 이성보다 본능이 앞설 만큼 배가 고프진 않았다. 그럼 왜? 나의 의문은 참치캔까지 집어들고나니 풀렸다. 캔 옆에 놓여져 있던 물건의 정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미역. 국 끓이기용으로 잘라서 소분한 절단미역이었다. 참치와 미역, 이 두 개를 보고 떠오르는 음식은 하나 뿐이다. 우리 어머니가 생일날마다 내게 끓여주신 음식이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국 요리. 나 또한 끓이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냄비와 다른 재료를 꺼내기 시작했다.
우선 물에 불린 미역을 흐르는 물에 씻은 뒤 물기를 짜준다. 그리고 그 미역을 냄비안에 넣는다. 참치캔의 기름을 두르고 미역을 볶기 시작한다. 어느정도 볶아졌다 싶으면 국간장과 다진마늘을 한 두 스푼씩 넣는다. 미역에양념이 다 되면 이제 냄비에 물을 가득 붓고 끓인다. 참치는 이때 넣어야 한다. 이렇게 푹 끓이면 끓일수록 진해지는 국물이 별미인 참치미역국이 완성되었다.
소불고기에 참치미역국. 그게 내가 생일날마다 받은 밥상이었다. 아버지는 왜 미역국에 참치를 넣냐며 매년 어머니를 타박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생일의 주인이 이게 좋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면서 한마디도 지지 않으셨다.
나는 당연히 소고기미역국도 좋아했다. 좋아했지만 참치미역국을 더 좋아했을 뿐이다. 소고기미역국은 다른 곳에서도 먹을 수 있지만 참치미역국은 그러지 못했으니까. 특별한 날에 먹는 특별한 음식은 더없이 각별한 법이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푹 떠서 한입 먹어봤다. 분명히 맛은 있었다. 싱그러운 미역에 짭짤한 참치의 기름기가 섞여 감칠맛이 입안을 가득 맴돌았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비슷한 건 생긴 게 다였다. 다만 추억이 담겨 있었다. 이제 다신 먹지 못하는 미역국. 돌아갈 수 없는 옛날과 변하고 만 우리 식구의 숫자.
왜 추억에는 냄새가 있는가. 왜 이 그리운 냄새는 나로 하여금 정체된 시간 속에 빠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만드는가. 내가 기억하는 맛은 이게 아닌데. 고작 형태가 같다는 이유로 난 추억의 조각을 떠올리는 한편으로 생생한 쓰라림을 느꼈다.
결국 몇번 먹지도 못하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감정은 불명확하나 원인은 분명했다. 내 요리실력이 미진해서가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는 정정했던 기억의 단편조차 아득한, 먼 예전의 애수 때문이었다.
한동안 떠올릴 일이 없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불현듯 나타나고 말았다. 마치 천장에 낀 얼룩처럼 친근하고 지리멸렬한 매복이었다. 아니, 어떻게 보면 참치캔에 시선을 빼앗긴 시점부터. 주말에 입맛이 이상한 샛길로 빠졌을 때부터 난 이 매복을 마음 한구석에서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피하고 싶은 마음도, 부정하고픈 마음도 없었다. 그 끝에 다다른 결론도 매한가지로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