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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라 Nov 12. 2021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도 살아남는 방법



어느 날 냉장고를 정리하다가 오래된 딸기를 발견했다. 딸기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해있었다. 곰팡이가 슬었고 색이 변했고 물렁해져서 먹기는커녕 쳐다볼 수도 없는 처참한 지경이었다. 그게 딸기였다는걸 알아내기까지 사실 한참을 들여다봐야 했다. 나는 그 딸기를 산 날을 기억했다. 날씨가 좋았고 마트에서 명품딸기라는 이름을 들먹이며 산더미처럼 쌓인 딸기를 팔고 있었다. 가장 무르지 않고 탐스러운 것들로 골라서 결제를 하고 집에 와서 딸기를 씻고 몇 개를 씻으면서 집어 먹었다. 명품이라는 이름이 붙어서 그런지 딸기 씨 한 알 한 알까지 좀 더 달게 느껴졌다. 무엇이 다른지는 모른다. 유전자 변형이 있었던 건지 포장재의 값이 더 나가는 건지 모른다. 그래도 역시 명품딸기는 다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배가 불러서 제일 좋아하는 그릇에 담아 예쁘게 랩을 싸서 냉장고에 넣어뒀다. ⠀



그리고 잊어버렸다.


냉장고에서 나를 기다리는 딸기를 완벽하게 잊어버렸다




한참이 지난 뒤에 딸기를 다시 발견하면 그건 더 이상 명품이 아니다. 음식물 쓰레기일 뿐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별이란 딸기 같은 것이다.라고



누군가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근사해서 좋아한다. 그 사람에게 알 수 없게 끌린다. 그리고 그 사람의 근사한 점과 병신 같은 점들을 알아간다. 그 사람의 근사한 점을 더 근사하게 바라본다. 병신 같은 점들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이 얼마나 멋진지에 대해 모든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를 위해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쓰면 쓸수록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운이 좋으면 서로 사랑한다고 말한다. 운이 나쁠 때는 사랑한다는 말을 기다린다. 아름답고 완벽한 시간들이 온다. 처음에는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행복했지만 나중에는. 라면 하나를 끓여서 나눠먹어도 행복하다. 그 사람에게 평생 라면을 끓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그런 숭고한 생각을 하는 걸 보니 진정한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다. 그 사람을 위해 양말을 개고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잠이 들고 깨어나서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잠든 얼굴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구나 생각한다. 이 사람을 지켜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면 믿을 수 없게도, 무언가 누군가에게 믿을 수 없는 일이 생긴다. 그 사람의 사소하고 병신 같았던 점들이 나타난다. ⠀



믿을 수 없게도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가장 병신 같은 짓을 하게 된다. ⠀



그 사람도 나도 별수 없는 병신 같은 인간이구나 깨닫는다. 병신 같은 말들이 몇 번 오가고 나면 누군가는 이별이라는 말을 꺼낸다.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인지 이토록 아름답고 완벽한 시간을 함께해온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인지. 그러나 알고 보면 둘 다 근사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은 둘 다 병신이었기 때문에 그토록 근사한 감정을 바라 왔던 것뿐이다. 불가능한 감정을 바라 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은 실온에 오랫동안 내버려 둔 딸기처럼 변해버린다. ⠀




나는 딸기를 처음 사온 날을 기억한다. 이별이란 딸기를 음식물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는 것보다 천배는 더 귀찮고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 모든 시간들을 쓰레기봉투에 담아서 내다 버려야 한다. 소중했던 기억들. 그 사람이 나를 보며 웃던 얼굴. 함께 갔던 장소들. 함께 찍었던 사진들. 혼자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던 시간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속으로 여러 번 했던 말들. ⠀


내가 사랑하는 사람 ⠀


을 유통기한 지난 딸기처럼 쓰레기봉투에 담아 버리는 것이 이별이다. 몇 개의 기억을 겨우 내버리고 나면 다음날이면 몇 개의 기억이 또 떠내려와 있다. ⠀



그만하고 싶다. 고 생각한다. 누군가 머리를 세게 쳐서 이 기억들을 다 잃고 싶다고. 아니면 지구가 멸망해서 이런 행동들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쉽게 기억을 잃지도 않고 지구도 쉽게 멸망하지 않는다. ⠀



쓰레기 같은 이별을 극복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쓰레기가 되는 것이다.



내가 절대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난다.

무의미한 시간들을 보내고 이 사람이 그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두 명을 세명을 만난다.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들과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고 무의미한 얘기들을 계속한다. 술을 마시고 펑펑 울기도 하고 글도 쓰고 한 명에게 전화하지 않기 위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기도 한다. 악몽을 꾸고 울면서 잠에서 깨어난다. 악몽은 별게 아니다. 보고 싶은 사람이 꿈에 나타나는 것이다.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사람과 데이트를 한다.


열 번째 데이트를 하기 전에는 대게 모든 관계가 끝이 난다.

다시 사랑을 할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일 거라고 생각한다.

제발 다시 사랑에 빠지게 해 주세요 라고 매일 기도한다.

물론 신은 쉽게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다. 운이 나쁘면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몇 번 보내야 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한 게 언제였지?

기억이 나지 않는 시간이 온다.



어느 날 문득 마트에서 산더미처럼 쌓인 딸기가

눈에 보이면 깨닫는다. 너무 많은 계절을 잃어버렸다는 걸.

이제 이 쓰레기통에서 나가고 싶다는 걸.

결국 그 사람은 내게 돌아오지 않았고

지구도 멸망하지 않았고 기억을 잃어버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인간은 다시 딸기를 사는 동물이다. ⠀



다시는 딸기를 먹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해도. 인간은 다시 딸기를 산다. 냉장고 속에서 버리기 위해서인지 뭐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래. 누가 사랑에 대해 다음에 묻는다면 사랑은 딸기 같은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건 아름답고 달고 시고 쓰고 병신 같고 처참하고 쓸데없고 가장 이상한 감정이다. 그리고 인간은 영원히 딸기를 산다. ⠀







⠀ ⠀2020년 3월에 쓴 글을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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