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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라 Jan 04. 2022

 나의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다를 떠도는 작은 스티로폼 조각의 이야기



"나의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 칼로의 일기장에 써진 마지막글







2007년



매일매일. 막연하게 나는 다른 나라에 가고 싶다고 생각을 했다. 어느 곳이라도 좋았다.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라도. 시폰으로 된 가벼운 맥시 드레스를 입고 싸구려 선글라스와 여권을 손에 든 채 멍하니 공항에 앉아있고 싶었다. 출입국 신고서를 쓰면서 내가 잊어버린 내 이름에 대해 한참 동안 생각해보고 싶었다. 몇 날 며칠을 최대한 빨리 떠날 수 있는 비행기표를 찾아 헤맸다. 어느 나라여도 상관없었지만 그냥 더운 나라였으면. 추위에 떨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했다. 사진은 한 장도 찍지 말아야지. 화장도 하지 말아야지. 그냥 내가 속해있던 곳을 벗어났다는 자유를. 단 며칠간만이라도 누려보고 싶었다. 산호초 때문에 이곳과 다르게 명쾌한 푸른색을 보이는 남태평양의 섬들의 사진을 몇 날 며칠이고 들여다봤다.


떠나는 것을 매일 꿈꿔왔으면서. 매일 나는 떠나지 못했다. 이 일이 끝나면 떠나야지. 이것만 마무리되면 떠나야지. 이 건이 결제되면 떠나야지. 그렇게 결심하면 도미노처럼 끝나지 않는 일들이 밀려들어왔다. 클릭 한 번이면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그 도피를. 나는 한 번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일상의 도미노 아래에서 나는 매일 그 섬들을 들여다봤지만. 이상하게 보면 볼수록 모든 섬이. 모든 도시가 같아 보였다. 여느 면세점에서나 똑같은 제품들을 파는 것처럼. 어느 곳으로 떠나더라도 돌아오는 길에는 두세 배로 무거워진 캐리어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몇 배로 몸집이 커졌을 일들과 그런 것들에 대한 강박만으로도 지치는 귀국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간이 늙는 것은. 피부가 늙고 주름 짓는 것이 아니라 인생에서 더 이상 흥미로운 것이 없을 때라고...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 더 이상 흥미로운 것이 없을 때 인간은 늙는다.


다시 한번 그 글자를 적으면서 나는 내가 새삼스럽게 얼마나 늙어버렸는지를 느꼈다. 아 나는 이제 떠나는 것조차 즐겁지가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아무것도 버릴 수도 없고 떨쳐낼 수도 없고. 아무것도 선택할 수가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떠나는 것에 대한 홀가분함보다 돌아왔을 때의 고됨이 먼저 생각을 잠식하게 되는 그런... 자유가 눈앞에 있어도 속박을 선택해야 한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런.






2008년



여기까지 글을 적고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많은 나라들을 다녔지만 내가 원하는 그런 형태의 것이 아니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였거나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떠나고 싶었는데 그게 무엇으로부터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를 구속하는 것들?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것들? 내가 감당해야 하는 것들?


아니었다.


나는 그냥 나 자신에게 지쳤던 것 같다. 그래서 비겁해지고 싶었던 거였다. 마치 다른 곳에 가서 다른 사람인양 행세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은 똑같다.

모두가 시간을 돈과 바꾸고 꿈을 돈과 바꾸고 사랑마저 다른 기회비용과 바꾼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맞바꾼 것들은 나를 그만큼 행복하게 해주지 않았다. 남들보다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한 칸씩 한 칸씩 계단을 올라갔는데. 올라서서 본 풍경이 그렇게 멋지지 않았다. 끊임없이 걷고 달리고 뛰어넘어야 했다.


아침에 눈을 떴는데 매일 창밖에 에펠탑이 보인다고 해서. 밤마다 몰디브의 해변을 걸을 수 있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즐긴다고 해서. 백 퍼센트 행복해질 수 있을까. 내가 여기서 찾을 수 없는 행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2009년


여기까지 쓰고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나는 더 많은 것을 해야 했고 책임져야 했다.


나는 떠나는 것을 단념하고 사람에게서 행복을 찾으려고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 사람이 내겐 한 나라였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 사람이 옆에 있으면 밤마다 에펠탑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만지거나 심장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사람과 걷는 거리는 언제나 낯선 거리였고 모든 게 새로웠다.


모든 것을 함께 나누었고 행복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함께 다른 나라에 가자고 했다. 그 사람의 가족들은 내가 함께 떠나길 바랬다.


나는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생각했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 질 때마다 이 글의 두 번째 문단을 다시 떠올렸다. 나는 떠날 수 없었다. 흥미로운 게 없어서도 아니었고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그냥 나는 떠날 수 없었다.


사랑이란 필요로 할 때 곁에 있어주는 것이라는 생각에 우리는 동의했다. 나는 함께 있어주지 못했고 나는 그 사람을 잃었다.






2019년.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밤에 나는 메모장에서 이 글을 찾아냈다. 처음에는 그냥 떠나고 싶다고 쓴 글이었는데. 너무 많은 것들에 대해 말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나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을 거고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존재할 거라는 것이었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떠나지 않고 비겁해지지도 않을 거고 사람에게서 행복을 찾지도 않기로 했다.


나는 그냥 나인채로 이곳에 오랫동안 존재할 것이고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보다 강한 사람일 것이다.

일단은 그게 좋지 않을까.





2022년 1월



가끔 바다 위에 떠있는

스티로폼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람과의 관계는

너무 쉽게 가까워지고 너무 쉽게 멀어진다.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던 모습이

다음 순간에는 영원히 볼 수 없는 장면이 된다.

내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멀어지는 것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붙잡을 수가 없다.


그냥 흘려보내야 하는 게 너무 많다.


한때는 내가 해파리나 돌고래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보니 그저

스티로폼이었던 것 같다.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다.

누가 그곳에 가져다 놨는지 모르지만

영원히 세상을 떠돌고 있다.



2022년, 몇 번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날짜다.

어느 날 밤에 문득 누군가가 말한다.

떠날 수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어?라고.


그냥. 어디로든.

매일매일 공항 벤치에 앉아 출입국신고서를 쓰는 꿈을 꿨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꿈도 꾸고 사람이라는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꿈도 꿨다.   

그리고 1년, 2년. 10년... 시간이 흘렀다.


어느 날 문득 잠에서 깨면

너무 낯선 천장이 보인다. 여기가 어디인지 내가 누구인지

금방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불과 몇 초이거나 몇 분이지만

결국 평생을 떠나온 거다. 인생이라는 건.


멀어지는 것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붙잡을 수가 없다.

그저 흘러가고 흘러가는 대로 두고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이 천장이

내게 더 익숙해지기만을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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